묵계암, 백운산

한옥인생 김창호 도편수

대가야고령 2012. 4. 22. 22:21

 

2012. 1. 21 부산일보에

[+(+)] 도편수의 한옥인생 김창호

솔향 매력에 빠져 산 26희고 고운 대팻밥만큼 목수 도량도 깊어집니다

 

 

 

 

[+(+)] 도편수의 한옥인생 김창호

김창호 도편수가 큰자귀로 서까래를 다듬고 있다. 요즘 한옥 건축 현장에는 엔진톱과 전기대패가 도입돼, 자귀나 도끼 등 전통 공구를 이용해 나무를 다듬는 치목 기법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김병집 기자 bjk@

 

 

 

그 남자에게서 나무 냄새가 난다. 경북 봉화군 춘양면 금강소나무와 하룻밤 잤나 보다. 금강송이 밤새워 풀어낸 제 고향 산골 이야기일까? 희고 고운 속살의 대팻밥이 발아래 긴 사연처럼 수북하다.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용흥리 목정(木丁) 김창호 도편수의 치목장. 나무를 깎고 자르고 다듬는 거친 사내들의 몸에선 저마다 솔향이 풍겼다.

한옥을 만드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부리고 보듬는 대목의 최고봉 도편수. 누비옷을 입고 고구려식 두건을 쓴 도편수. 그런데 얼굴이 낯설다. 주름과 연륜이 배어 늙수그레 할 줄 알았는데 20대로 보아도 좋은 홍안이다. 46, 말띠란다. 그래도 젊다. 한옥 세상을 꿈꾸는 젊은 도편수를 만나고 왔다. 솔향이 아파트 안까지 따라와 코끝에서 수런거렸다.

 

# 손자귀

 

합천군 가야면 황산리. 해인사 아래 깡촌. 창호네 집은 넉넉하지 않았다. 부지런한 아버지 덕에 배는 곯지 않았지만, 형들은 일찌감치 돈을 벌러 나가야 했다. 열다섯 살 차이가 나는 첫째 형 창록은 기왓일을 하는 와공이었다. 형의 일감이 많을 때면 어린 창호도 현장으로 가 흙물이라도 날라야 했다. 창호의 아버지는 가진 재산보다 부지런함이 더 많은 분이었다. 가야산 해인사가 지척이었다. 어느 날 경운기를 한 대 사더니 운수업(?)을 시작했다. 사과가 많이 나는 고장이어서 사과상자를 해인사가 있는 치인 마을까지 실어주고 품삯을 받았다. 도자기 공장에 새끼를 꼬아서 팔기도 했다. 사업 수완이 있는 분이었다.

 

 성지중 졸업하자마자 짜장면 배달·식당 전전

 

 기왓일하는 형님 도우러 갔다 목수일에 매력

 

 불국사 중창 당대 최고 목수 김창희 선생 사사

 

10년 만에 목수의 최고봉인 '도편수' 올라

 

문화재수리기능자 시험도 최연소 합격

 

 

당신의 식견을 너무 믿었던지 어느 날 온 가족을 이끌고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 창호도 해인중 1학년을 다니다가 부산 성지중으로 전학을 갔다.

 아버지 친구 분이 연탄공장 함바집(현장 식당)을 받도록 해 주겠다는 말만 믿고 이사부터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대영연탄 함바 운영권은 2년을 기다려도 아버지에게 오지 않았다.

51. 형들과 누나는 이미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중학교를 갓 마친 막내 창호도 일을 시작해야 했다. 창호의 나이 16세였다. 어린 창호의 삶은 손자귀에 몸을 맡긴 옹이 많은 나무처럼 찍힐 곳이 많았다.

 

 

 

 

# 모탕

 

 

김창호 도편수는 요리를 잘한다. 학원도 다녔다. 중학교를 갓 졸업하고 힘도 딸리고, 기술도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식당 배달원이었다. 목수 일을 배우기 전까지 다닌 중국집만도 10군데가 넘는다. 직물공장에도 취직을 했고, 서울 태릉에서는 직접 짜장면 집을 개업하기도 했다. 호텔 요리사도 있고 일식 주방장도 있는데 하필 중국집이었다. 요리학원에서 친하게 지낸 형이 중국집 주방장인 게 패착이었다. 혈기 하나만으로 시작한 식당은 쉽게 일어서지 않았다.

 

와공인 큰형님은 여전히 큰 공사를 많이 했다. 기와를 이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 전국에도 많지 않아 절집이나 문중 재실, 궁궐 등 국가 문화재 공사를 많이 했다. 그런데 기왓일은 아무리 길어도 보름을 넘기지 않는다. 한번은 공주 동학사 일을 맡았다. 큰형님 일을 도우러 갔다. 나무를 다루고 대패질을 하는 목수가 너무 좋아보였다. 목수가 정말 되고 싶었다.

 

 

"형님, 저 목수 할랍니다." "식당은 우짜고?" "너무 멋있네예. 여기서 일할랍니다." 그런데 형님이 반대를 하셨다.

 

"목수일은 아무 데서나 시작하면 안 된다. 기다리 봐라." 한 달 뒤 큰형님 창록 씨가 불렀다. "내하고 갈 데가 있다. 짐 챙기라."

 

형님을 따라간 곳이 통영 미래사 건축 현장이었다. 그곳에 해운 김창희 선생이 있었다. 불국사를 중창한 당대 최고의 목수.

 

"선생님한테 일 제대로 배워라. 못 배우면 아예 집에 올 생각도 마라. 알겠나!" 형은 훠이훠이 떠났다. 큰형과 스승은 창호 씨에게 목재를 가공할 때 쓰이는 받침목인 모탕 같은 존재였다.

 

 

 

# 큰자귀

 

스승 김창희 선생은 위대한 목수였다. 해운대 해운정사를 지을 때다. 한 번은 전자계산기를 분해하고 계셨다. 이 조그만 기계 안에서 어떻게 사람보다 더 빨리 계산이 이뤄지는지 궁금해서 그런다고 하셨다. 전자계산기는 온전하게 재조립되었다.

한옥 목수 생활이라는 것은 유목민의 생활과 같다. 짧게는 3개월, 길게는 3년을 머물다가 그 집이 완성되면 또 다른 곳으로 떠난다. 어떤 해는 한 해에 명절 두 번과 어른 제사 한 번 포함해 단 세 번밖에 집에 다녀오지 못할 때도 있었다.

 

창덕궁 인정전과 동서행각 정비공사를 할 때이다. 인근 경복궁에서는 또 다른 목수팀이 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곳은 서울 출신 목수가 공사를 맡았다. 시골 목수팀과 서울 목수팀이 은근한 경쟁을 했다. 경쟁이라야 각자의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이지만 편수(목수)들의 간접 실력 비교도 예민했다. 그 실체가 문화재기능자 시험. 한옥 목수에게도 국가가 인정하는 자격증이 있다. 문화재수리기능자나 문화재수리기술자이다. 문화재청이 엄격한 심사를 통해 발급한다. 김창호 편수는 스물일곱이 되던 1993년 문화재수리기능자 시험에 도전했다. 창덕궁 팀 목수 4명과 함께였다. 결과는 다섯 명 모두 탈락. 경복궁팀은 시험 결과가 좋았다고 들었다. 스승을 볼 면목이 없었다.

 

 

 

희고 고운 대팻밥만큼 목수 도량도 깊어집니다

 

 

김창호 도편수가 경복궁 근정전 하층 공포를 3분의 1로 축소한 모형을 설명했다. 공포는 처마를 높이기 위한 한옥 고유의 건축 양식이다. 김병집 기자 bjk@

 

다음 해 또 도전을 했다. 창호 씨는 큰자귀를 들었다. 먹줄이 먹여진 육송을 모탕 위에서 굴려가며 깎기 시작했다. 심사위원들이 모두 창호 씨 옆으로 몰렸다. 시험을 치르던 수험생들도 창호 씨의 자귀 솜씨를 보러 둘러섰다. 예감이 좋았다. 최연소로 문화재기능자 합격을 했다.

 

대패가 아니라 자귀로 둥근 기둥을 깎는 기술은 전통 한옥 목수라면 꼭 지녀야 할 기술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아름다운 배흘림 기둥은 대패가 아니라 도끼로 다듬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손기술이 있어야 제대로 된 목수인 것이다.

 

 

# 먹통과 곡자

 

어머니를 위해 지은 한옥 선자연의 우측 식당 건물 대공은 활처럼 굽은 육송울 써서 자연미를 살렸다. 김병집 기자

 

 

목수면 목수지 무슨 구분이 있겠냐마는 한옥 목수는 그 역할이 엄격하다. 목수의 최고봉인 대목을 지칭하는 말이 도편수이다. 설계, 관리, 섭외 등 공사를 총괄하는 대표이다. 그 아래 부편수가 있다. 도편수의 지시를 받아 나무에 먹줄을 놓고 작업을 지시한다. 먹줄은 별도의 설계도가 없는 전통 방식의 한옥 건축에서 나무에 직접 그리는 설계도인 것이다. 이것을 부편수가 한다. 기역자처럼 생긴 곡자와 대나무로 만든 먹칼로 나무에 선을 긋고, 먹통의 줄을 튕겨 나무를 깎는다.

 

먹줄을 잘못 놓으면 나무는 엉뚱하게 가공이 되기에 편수들은 언감생심 먹통을 쥘 생각도 못하고 멀찌감치서 쳐다볼 뿐이다. 이렇게 울퉁불퉁한 나무에 먹줄을 놓고 대패로 깎으면 이것이 팔각 기둥이 되고 또 16각 기둥, 32각 기둥으로 바뀌면서 결국은 원형 기둥으로 탄생한다. 그때마다 먹줄을 놓아야 한다.

 

 

 

나무 생긴 모양대로 사용

가공 어렵지만 그만큼 보람

한옥이 춥다는 생각은 편견

잘 지으면 영하에도 훈훈

 

창덕궁·동화사 보수부터

산림박물관 완공까지

다양한 공사 경험

치목장서 제자들 키워

한옥 보급 늘리는 게 꿈

 

창덕궁 보수공사를 할 때이다. 당시 스승 휘하에 먼저 입문한 사형이 부편수로 먹통을 잡고 있었다. 사형이 어느 날 일을 그만 두었다. 자기 이모부가 도편수였는데 갑자기 과로로 돌아가셨다. 그 일을 맡아야 한다며 현장을 떠나면서 창호 씨를 부편수로 추천했다.

 

스승 김창희 선생도 고개를 끄덕였다. 40년 경력의 편수들이 수두룩한데 8년차 목수가 먹통을 쥔다니 현장이 술렁거렸다. 다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창호 씨를 입방아에 올렸다.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그런데 더 큰 시련이 닥쳤다.

 

 

 

# 대패와 대팻밥

 

당시 어머니는 대구에 계셨다. 집에 볼일이 있어 한 3일 현장을 비우고 휴가를 다녀왔다. 작업 지시를 해 놓았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아 밤 기차를 타고 올라왔다. 기둥 위에 둥근 가로 목재인 도리를 올리는 작업을 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40여 개의 도리가 모두 다섯 치(15가량)씩 짧은 것이다. 한두 개도 아니고 40개나, 그것도 모두 꼭 다섯 치씩 짧으니 하늘이 노래졌다. 사단은 이랬다.

 

부편수 창호 씨가 휴가를 간 사이 다른 목수가 먹줄을 놓았는데 보 머리만큼을 빼먹고 놓은 것이다. 편수들은 먹줄대로 가공을 하니 당연히 도리가 다섯 치 짧을 수밖에 없었다.

 

고민 끝에 스승에게 사실을 알렸다.

 

"야 인마, 니가 그러고도 부편수가? 목수 신문에 날 일이네. 내사 넘사시러바서 말도 못하겠다." 스승은 노발대발하셨다. 궁궐을 짓는 현장에서 이런 상황이 발생했으니 말이다.

 

창호 씨는 부리나케 움직였다. 비슷한 크기의 목재를 현장에서 찾아내고 짧아서 쓰지 못하는 목재는 다른 곳으로 돌려 재가공을 해서 쓰게 했다. 일이 잘 수습되자 나이 많은 편수들이 "고생하셨다"며 부편수의 역할을 인정해 주기 시작했다.

 

나무를 대패로 깎다 보면 처음엔 껍질의 붉은 살이 나오고, 점점 흰 살이 나온다. 깎으면 깎을수록 아름다워진다. 현장에서 대팻밥을 먹는 만큼 목수의 도량도 깊어진다.

 

# 선자연

 

스승 해운 김창희(왼쪽) 선생이 완도 산림박물관 상량문을 직접 쓰고 있다. 김창호 제공

 

한옥 최고의 기술은 선자서까래 가공이다. 선자연(扇子椽)은 선자추녀에 부챗살같이 댄 서까래이다. 잘 짜여진 선자연은 위에서 물을 한 동이 부어도 한 방울도 새지 않는다. 목수가 시연할 수 있는 최고의 솜씨가 선자연 기술이다.

 

도편수 김창호 씨는 1996년 스승의 품을 떠나 독립을 했다. 소설가 정동주 선생으로부터 목정(木丁)이라는 호도 받았다. 첫 작품은 합천 모 문중의 재실. 세 명의 목수와 한 열흘쯤 나무를 깎았을까. 건축주가 대목 양반은 언제 오느냐고 물었다. 또 한 보름이 지나자 큰 목수 언제 오느냐고 또 물었다. '제가 도편숩니다'라는 말을 차마 못했다. 드디어 상량식을 하는 날이 왔다. 도편수는 이름이 상량문에 오른다. 그제야 사실을 건축주에게 털어놓았다.

 

건축주는 호방하게 웃고 막걸리 한 사발을 그득 따라주며 "이렇게 솜씨가 좋은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고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스승도 젊은 도편수 창호 씨를 후원했다. 문화재 수리작업은 까다롭다. 학자와 공무원들의 입김이 많다. 팔공산 동화사 대웅전 보수를 할 때이다. 대들보의 굵기를 가지고 회의가 열렸다. 젊은 도편수가 못 미더웠던지 자문 기술자를 불렀다고 했다. 회의실에서 기다리는데 스승 김창희 선생이 들어왔다.

 

좌중을 둘러본 스승은 딱 한마디 하셨다. "교수라는 분들이 할 일 없으면 집에서 잠이나 자지. 도편수 하자는 대로 하세요." 그러고는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공무원들은 왜 진작에 김창희 선생 제자인 것을 말하지 않았느냐며 타박을 했다.

 

# 다시 모탕

 

용문양 먹통은 해운 선생 기문의 증표와도 같다. 김병집 기자

 

 

도편수 김창호 씨의 꿈은 한옥이 좀 더 많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보급형 한옥을 꿈꾼다. 한옥이 춥다는 고정관념을 버리라고 했다.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치목장 옆에 지은 서른평 한옥 '선자연'은 영하의 겨울날씨임에도 문을 열어 놓아야 할 정도로 훈훈했다. 문을 닫으면 바람 하나 새어 들어오지 않았다. 겉은 날아갈 듯한 한옥이지만, 실내는 아파트형이었다.

 

"굽은 부재를 씁니다. 대들보를 굽은 육송으로 쓰면 곧은 목재보다 3배 정도 하중을 더 견딥니다. 운치도 있고요."

 

김창호 도편수의 한옥 기법은 가급적 나무가 생긴 모양대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가공은 훨씬 어렵지만, 그만큼 보람이 있다. 큰 목재가 마르면서 크랙()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이것을 없애는 자기만의 노하우도 갖고 있다. 기둥이 없는 마루도 그만의 기술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마음에 꼭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승 김창희 선생도 집이 마음에 안 들면 제 돈을 들여 다 뜯고 다시 지을 정도로 깐깐한 분이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는 소리를 듣고 싶다.

 

치목장에는 많게는 서른 명, 적게는 열 명 정도의 편수들이 늘 일한다. 이 사람들과 2008년 궁궐을 제외하고 단일 한옥으로 최대 크기인 400평짜리 전남 완도 산림박물관 공사도 해냈다. 김창호 도편수는 이제 그 사람들의 모탕이 되고자 한다. 제대로 된 한옥 목수가 많아야 한다는 생각에 자신의 기술을 아낌없이 전한다.

 

그에게는 보물이 하나 있다. 김창희 '기문'임을 증명하는 용머리 먹통이다. 창덕궁 공사를 할 때 괴목(느티나무)으로 만든 것이다. 스승 먹통의 용은 반눈을 감고 있다. 젊은 도편수 먹통의 용눈은 부리부리하다. 2010년 작고한 스승을 좇아 당대 최고의 목수가 되겠다는 다짐이다.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약력

 

1966년 경남 합천군 가야면 황산리 출생

 

1979년 부산 남구 우암동으로 이사

 

1982년 부산 성지중 졸업 후 취업

 

1986년 해운 김창희 선생 휘하에 입문

 

1993년 창덕궁 인정전 공사 부편수

 

1994년 문화재 수리기능자 최연소 합격

 

1996년 독립 후 지리산 벽송사 선방 신축

 

2001년 경북 고령군 덕곡면에 치목장 마련

 

2001년 덕수궁 함녕전 보수

 

2008년 전남 완도 산림박물관 신축

 

2011년 합천 해월사 대웅전 신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