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랑

[스크랩] 법정스님 다비식에 다녀왔습니다!

대가야고령 2011. 2. 16. 17:46

 

[구석구석 남도답사 1] 순천 송광사  

법정 스님 다비식에 다녀왔습니다! 

  

 지난 11일, 오랜 기간 폐암으로 투병하시던 법정 스님께서 타계(他界)하셨습니다. 끊임없는 저술 활동과 수행 정진으로 국민의 큰 스승님(師表)으로 자리하신 스님. 고인의 유언에 따라 서울 길상사에서 12일 송광사로 옮겨 안치된 법구(스님의 시신)이 13일 다비(茶毘)된다는 소식을 듣고, 13일 블로그기자가 그 현장을 직접 찾아 그 마지막 과정을 담아 보았습니다.

  

 

송광사, 법정 스님의 처음과 끝

 

▲터미널에는 전국 각지에서 스님의 마지막을 기리기 위해 오신 분들이 길게 한 줄로 늘어뜨려 있었습니다.

ⓒ 박샘별

 

아침 8:30, 광주터미널에서 송광사로 직행하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11시에 다비식이 있었기에 제 시간에 도착할 지 걱정이 앞섰지만, 다행히 터미널 측에서 송광사 직행 버스를 증편하여 넉넉하게 갈 수 있었습니다. ‘유일하게 존경하던 인물’이라며 연신 눈물을 찍어내시던 중년의 아주머니를 비롯, 길상사 시절 스님의 법문에 깊이 감화되었던 신실한 불교 신자 분, 스님의 책을 즐겨 읽어 거의 모든 저서를 소장하셨다시피 하셨다던 분, 어떻게든 가시려고 버스 뒤켠 복도에 서거나 버스 앞편 계단에 걸터앉으신 분 등으로 차안은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버스 좌석에 앉아, 스님께 송광사가 갖는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서슬 퍼런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 인혁당 사건으로 청년 8명에 사형선고가 내려지던 데 분개하면서도, 어떤 대응을 하지 못했을 무력함, 그 꽉 삼킨 분노를 속세에서 풀어놓지 못해 속세를 버리고 떠난 법정. 그런 법정을 다시금 가다듬게 해준 곳이 바로 송광사였습니다. 송광사 뒤켠에 불일암 암자를 짓고 살았던 17년 세월은, 토굴에서 면벽수행하듯 스스로를 채찍질했던 치열함의 증거였을 테지요. 서울에서 오랜 기간 투병하시고, 길상사에서 입적(入寂; 돌아가심)하신 스님을 굳이 멀리 떨어진 남도의 송광사로 옮겨 온 데에는 이렇듯 법정 스님과 송광사의 각별한 인연이 크게 작용했을 터였습니다.

이제 그곳은 스님의 출가본사이기도 하지만, 스님의 마지막 매듭을 지은 공간으로도 기록될 것입니다. 스님 생애의 처음과 끝일, 송광사. 버스가 고속도로를 타고 송광사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설수록, 장소가 지니는 의미의 무게에 고개가 떨궈졌습니다.

 

 

밀물처럼 밀려든 추모 행렬 

 

▲송광사/주암 요금소부터 밀리기 시작한 차량은 승평삼거리를 넘어서부터 정체,

거북이걸음을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보니 갓길에 차를 주차하고 도보로 걷는 분들이 늘어나기도 했습니다.

ⓒ박샘별 

 

▲법정 스님의 법구를 운구하는 모습(상)과, 행렬을 뒤따르는 수많은 인파들의 모습(하). 

ⓒ한영희

 

부근부터 길이 막혀, 10분 만에 당도했을 거리를 50분여를 낑낑대며 송광사 경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스님의 법구가 송광사에서 다비장을 향함에 따라 인파의 행렬이 송광사 주차장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구름처럼 운집(雲集)한 인파는 어느덧 주차장을 지나 산길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삿길인데다 어느 길은 우둘투둘한 바윗길로 평탄치 않았습니다. 진행팀에서는 법정스님 법구 운구행렬 및 고승 분들을 먼저 올려 보내고, 일반 추모객들을 통제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아 보였습니다. 이미 서울, 경북 등 먼 타지에서 꼬박 밤을 지새우며 오신 걸음들이었기에, 추모객들은 여기에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산길을 올랐습니다. 끝끝내 스님의 마지막을 지키려는 수많은 걸음들. 인파에 떠밀려, 가파른 경삿길에 떠밀려 헉헉거리며 올랐던 길이 ‘복됨’으로 기억되는 이유입니다. (나중에 기사 검색을 통해 알게 된 바로는, 다비식에 참여한 추모 일행이 만 명도 넘었다고 합니다. 스님께서 ‘무소유’를 주장하신 대신, 귀한 사람들의 마음을 ‘소유’케 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아미타불에게 돌아가 의지합니다. 

 

▲법정 스님의 법구를 다비장으로 운구하는 모습(상, 중)과, 참나무더미를 쌓은 후 거화 준비를 하는 모습. 

ⓒ한영희 

 

행렬은 산기슭 움푹 꺼진 U자형의 지형 부근에 멈춰 섰습니다. 도착하니 먼저 당도한 운구팀 일행에 의해 다비식이 막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노란 띠가 둘러쳐져 접근이 통제된 다비장소 바깥 테두리부터, 스님의 다비식을 조금이라도 지켜보고픈 이들이 산 능선께로 올라 채운 수많은 사람들은 정갈한 목탁 소리에 맞추어 ‘나무아미타불’을 읊조렸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아미타 부처님께로 돌아가 의지(歸依)하겠노라는 간절함이 낳은 여섯 글자의 진언(眞言).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고도 불리는 아미타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후 중생에 대한 구원을 위해 극락에 머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망자(亡者)를 향한 ‘나무아미타불’은 그가 서방 극락세계에 다시 나기를 바라는 ‘극락왕생(極樂往生)’의 염원인 것입니다.

그러나 스님을 향해 바치는 ‘나무아미타불’은, 단순히 그에 대한 극락왕생을 비는 일차적인 뜻에서 그치지 않는 듯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 스님은, 스승은, 그의 삶 전체이자 귀의(歸依)할 삶의 지향이었던 것입니다. 눈물을 삼키며, 회한을 삼키며 읊는 나무아미타불에서, 아미타불은 ‘법정’ 그 자체로 대치되어도 무방한 것이었습니다. 스님 스스로의 삶이 자신의 깨달음을 쉬운 언어로 대중에게 끊임없이 설파하는 것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일생을, 가르침을 기대었던 정신적 아버지의 상실. 참배객들의 텅 빈 눈동자에 드리워진 상실의 그림자에서, 끝없이 깊어지는 슬픔 한 자락을 삼켜 봅니다.

 

 

 

다비, 생도 죽음도 결국 부질없으니...

 

 식은 평소 '번거롭고, 부질없으며, 많은 사람에게 수고만 끼치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행하지 말고, 관과 수의를 따로 마련하지도 말며,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 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해주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며, 탑도 세우지 말라'고 당부해왔던 스님의 뜻에 따라, 별도 절차 없이 거화(炬火; 불을 붙임)로 이어졌습니다. 

 

▲법정 스님의 법구에 거화하는 모습(1~4)과, 1시간여 후 장작더미가 대다수 불에 타 바스러진 모습(5). 

ⓒ한영희 

 

화염은 참나무 장작더미를 삼키며 타올랐습니다. 피어오르는 연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졌고, 불에 오래 그슬린 참나무는 바스라져 연기와 함께 흩날렸습니다. 철부지 아이들은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며 방방 뛰었지만, 그럴수록 가슴 한켠의 공허함은 더해갔습니다. 하물며 그분을 곁에서 모시던 상좌(上佐;불도를 닦는 사람이라는 뜻. 스승의 가르침을 잇는 역할.) 덕현스님의 고통은 오죽 더했을까요. 참나무 장작 하나가 불에 일그러져 분질러지는 모습을 지켜보다 울컥, 하셨던 모양입니다. 허리가 반쯤 꺾이시며 울음을 삼키시던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습니다.

 상여도 만장(輓章; 죽은 이를 슬퍼하며 쓴 글귀를 단 깃발)도 없이, 심지어 그 흔한 목관도 없이 평소 입던 갈빛 가사에 뒤덮여 오신 스님의 육신. 불에 타 흩날리는 나무장작과 함께 홀연히 사라져가는 그분의 모습에서,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감)’를 고스란히 체감해봅니다. 죽음마저도 무소유(無所有)를, 자연과 하나됨을 추구하셨던 그분을 닮아있구나 싶어 다시 고개를 끄덕여봅니다.

 

 

 

소박한 자연 그대로, 무소유의 삶 그대로, 불일암 

 

▲ 불일암 가는 길을 알려주는 여러 표지판들. 가장 최근에 붙여졌을 종이 안내표지(왼쪽 상), 

손글씨로 쓰인 '불일암 가는 길' 표지판(왼족 하), 'ㅂ'자만이 암호처럼 새겨진 원래의 표지판(오른쪽). 

ⓒ박샘별  

 

산채비빔밥과 동동주 한 잔으로 자연을 채운 후, 법정 스님의 흔적이 가득 서린 불일암 암자를 향했습니다. 암호처럼 ‘ㅂ’자만 새겨진 나무표식만이 이정표를 대신해, ‘아는 사람만 오는’ 곳으로 알려졌던 곳은 법정스님을 기리려는 발걸음이 늘자 입구부터 진한 글씨로 ‘불일암 가는 길’을 써 두었습니다. 신비스런 맛은 좀 떨어졌지만, 그만큼 스님의 뜻을 기리는 발길이 늘었구나 싶었습니다. 더군다나 오늘은 그분의 다비식이 있었던 만큼, 다비식에 참여했던 이들의 불일암 걸음이 오후까지 이어졌습니다. (제가 지나치다 뵌 유명인사만 해도 이계진 국회의원,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장만채 전 순천대학교 총장 등이셨고, 개인/단체로 암자를 찾는 분들도 많았으니까요.) 

 

▲불일암 가는 길 정경. 초봄의 푸름으로 뒤덮여 있던 산길. 솔숲, 도랑, 대숲이 정답게 어우러져 있습니다. 

 ⓒ박샘별 

 

 길은 초봄의 푸름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시누대(山竹)와 소나무, 길섶의 풀들이 햇살에 반짝이며 흔들렸습니다. 맑은 물이 또르르 흘러가는 도랑, 적당한 습기를 머금어 푹신한 흙길, 그 사이로 부는 서늘한 바람. 절로 시라도 한 소절 써질 것만 같은 오솔길. 그곳에서 스님께선 얼마나 많은 생각과 깨달음을 건져내셨던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길을 걷다 보니 어느덧 불일암 입구에 닿았습니다.

 

 

▲입구로 옹종옹종 놓인 징검돌과 대나무로 엮은 사립문. 

그리고 그 사립문 근처에 달아 놓은 '정진 중!' 및 '송광사' 팻말.

 ⓒ박샘별

 

 ▲ 불일암 내 여러 정경들. (왼쪽 위부터) 작은 샤워부스, (여전히 시원한!)샘터, 채마밭, 하사당 뒤 장독대,

정갈하게 쌓인 나무장작, 하사당 앞 디딤판, 마당의 통나무 의자, 기와로 두른 작은 연못, 망울이 진 매화.

 ⓒ박샘별

 

 안으로 들어서니, 주위 풍경과 자연스레 어울리는 작은 샤워 부스와 자그마한 해우소(화장실), 맑은 물 솟아나는 우물터와 그 곁에 소박히 묻힌 장독, 상좌(上佐)스님이 거처하던 하사당(下舍堂), 채소 반찬 일색의 소박한 밥상을 대변하듯 아담하게 가꿔진 채마밭, 휴식을 취하기 딱 알맞은 통나무 의자 서너 개와 정갈하게 쌓아둔 나무장작더미... 자연의 흐름 그대로, 무소유의 삶 그대로를 보여주는 그곳의 풍경들에 엷은 감탄사가 흘러나옵니다.

  

 ▲불일암 내부 여러 소품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서재에 난 창문으로 바라본 바깥, '청산도' 목판, 참배 후 돌아가시는 수녀님, 법정 스님께서 자주 앉으셨던 의자, 이철수 목판화, 탁자와 독서대, 국어대사전,

법정 스님 전집 등이 꽃힌 책꽃이. (중앙)불일암 내에 차려진 법정스님 빈소. 

ⓒ박샘별

 

 평소엔 일반인에게 알려지기 꺼려하셔서 철저히 비공개로 두었다지만, 이제 고인이 되신 지금 암자 내부도 공개해 놓았습니다. 암자 내부 곳곳엔 스님의 삶결이 그대로 묻어나는 소품들이 스님을 추억하고 있었습니다. 불일암에 기거하며 자신이 집필하신 여러 권의 전집을 비롯, 평소 우리말의 조탁(彫琢; 문장을 아름답게 다듬음)에 뛰어나셨던 것을 대변하듯 놓인 커다란 ‘우리말 사전’, 폭넓은 교양과 식견을 나타내주는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꽃힌 책꽂이는 그대로 스님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매끄럽게 깎인 앉은뱅이 탁자와 그 위에 세워진 독서대는 책꽂이의 책을 얼마나 정성스레 읽으셨을 지 짐작케 했습니다. 영정사진을 향해 꾸벅 인사하고 돌아서는데, 곁엔 까만 정복의 수녀님께서 그분을 향해 고개 숙여 참배하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큰 가르침이 이토록 종교를 화합으로 이끄는구나 싶었습니다.

 

 

 

 다시, 송광사에서 

 

▲왼쪽 위부터 차례대로-법정스님 입적 플래카드, 법정스님 법문 캘리그라피, 송광사 입구, 지장전 앞의 분향소 플래카드, 지장전 내 법정스님 빈소(좌) 및 참배 모습(우), 법정스님 극락왕생 기원 기와불사,

송광사 앞의 천도되지 않은 영혼이 머무는 곳. 

ⓒ박샘별

 

불일암에서 나와 향한 곳은 송광사입니다. 깔밋하게 정비된 길과 건물들을 지나, 송광사 본 사찰 경내로 들어섰습니다. 보수공사 중인 사천왕문을 지나 너른 마당에 널찍널찍 자리한 전각들을 스윽 훑어봅니다. 그리고 지장전. 오전에 죽음을 향해 물길을 건넜던 법정 스님의 법구가 화장이 마쳐지면, 다시 지나오게 될 공간일 테지요.

 지장전에는 다비식 이후 49재까지 내빈을 맞을 법정스님의 빈소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사람이 죽은 후 49일 동안, 7일에 한 번씩 7번을 정성을 들여 망자의 극락왕생을 비는 시간. 모든 이들의 간절함이 깃들인 만큼, 스스로의 수양이 깊으셨던 만큼, 부디 극락에서 행복하시기를. 지장전 한켠에 놓인 스님의 영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다시 한 번 기원해 봅니다.

 

 

 더 알아보기!!

 

 

*법정 스님(法頂, 1932. 10. 8~2010. 3. 11)

 

한국의 불교 승려, 수필가이다. 탁월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한 산문집을 통해 높은 인지도를 지녔으며, 그의 저서 '무소유'와 '버리고 떠나기'처럼 끊임없이 스스로를 갈고닦았던 수행자이기도 하다.

1954년에 승려 효봉의 제자로 출가하였고, 1970년대 후반 송광사 뒷산에 손수 불일암을 지어 지냈다.

2010년 3월 11일 서울 성북구 성북 2동에 위치한 길상사에서 폐암으로 향년 78세의 삶을 마감(입적)하였다.

 

 

*조계산 승보종찰 송광사

 

 송광사는 전라남도 순천시 조계산(曹溪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사찰로, 사적 제 50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신라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송광사는, 우리나라 불교 최대 종파인 조계종의 본사로, 조계종을 개창한 보조국사지눌 아래 16국사를 모시고 있습니다.

송광사는 삼보사찰(三寶寺刹) 중의 하나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삼보(三寶)란 불(佛 ;부처님 자체)·법(法 ;부처님의 설법)·승(僧 ;부처님의 뜻을 전하는 승려)을 말하며,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3가지 요소를 뜻합니다. 송광사는 이 중 예부터 큰 스님들이 많이 배출되어 승보사찰(僧寶寺刹)로 불립니다. 승보사찰이란 오늘날로 치면 우리나라의 '승려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승려가 되기 위한 공식 사미수행을 이곳에서 실시하기 때문입니다. 이외에도 양산 통도사(부처님의 진신사리-불(佛)을 모신 곳) 와 합천 해인사(팔만대장경-법(法))가 삼보사찰에 포함됩니다.

또한 송광사는 우리나라 전국 사찰 중에서도 문화재를 가장 많이 보유한 사찰로도 정평이 나 있습니다. 국보 제42호 목조삼존불감, 국보 제43호 고려 고종제서, 보물 제572호 수선사형지기, 보물 제1366호 화엄탱화, 보물 제1376호 티베트 문법지 등을 보유하고 있으며, 대웅전, 조사당 등을 비롯 50여 개의 가람이 사찰의 위용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다비茶毘, Jhapita

 

다비(茶毘)는 불교식 화장(火葬) 장례의식으로, 산스크리트어 ‘jhapita(연소시키다)’를 음역한 말입니다. 석가모니께서 입멸(入滅;열반에 듦)하기 전, 제자들이 장례법을 여쭙자 “왕 중 왕의 장례법으로 지내라, 금관에 넣어, 갖가지 향나무로 다비(화장)하라”고 유언한 이래 다비가 불교의 전통으로 내려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다비식을 ‘새로운 삶으로 통하는 엄숙한 문’으로 여기는데, 여기에는 죽음을 ‘거짓 덩어리(假合)인 육신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파악하였던 불교의 생사관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원래 다비의식의 과정은 다비장 조성에서 쇄골과정에 이르기까지 매우 복잡하다고 합니다. 다비의식을 상세히 기록한 문헌은 없지만, 전해오는 관습에 따라 다비장이 설치되고 의식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 제2기 문화재청 대학생 블로그기자단 박샘별 기자 (saemby@hanmail.net)

  

출처 : 환영합니다~ 문화재청 블로그입니다~
글쓴이 : 문화재사랑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