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팔 산악회

고령 대가야 물길 (옛길기행 매일신문)

대가야고령 2015. 11. 5. 11:25

 

 

RSS Twitter로 기사보내기 Facebook으로 기사보내기 Google bookmark로 기사보내기 NAVER Bookmark로 기사보내기 밴드로 기사보내기
2011.10.05 크게보기 작게보기 프린트 이메일 보내기 목록

고령 대가야 榮華엔 東 낙동-西 섬진

'江의 길' 있었다

 

대가야 도읍지인 고령읍 시가지 전경. 성주에서 흘러온 대가천과 합천에서 발원한 안림천이 합류한 회천이 고령읍 시가지를 거쳐 낙동강과 만나게 된다.

길은 사람과 마을, 고을과 도시를 이어주는 소통의 통로이며, 신지식과 문물이 교류하는 연결망이다. 길은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작은 오솔길에서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대로까지 많은 종류가 있다.

산에는 고갯길, 강에는 나루, 바다에는 뱃길이 만들어졌다. 대가야의 역사도 뭍길(陸路)과 물길(水路)이 만들어 놓은 ‘길의 역사’이다.

 

◆대가야시대 문화와 물류의 고속도로는 물길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사람과 물류의 이동에는 육로보다 수로가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령군은 1천600여 년 전 고구려`백제`신라 등과 함께 고대사를 이끌었던 대가야의 옛 도읍이었다. 대가야는 정치`사회`문화적으로 후기 가야 연맹 맹주로 최전성기를 누렸으며, 순장문화를 비롯해 가야금, 토기, 철기 등 독자적인 문화를 창출해 고대문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대가야는 479년 중국 남제(南齊)에 사신을 파견해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이라는 작호를 하사받는 등 당당하게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등장했다. 또 바닷길을 통해 일본과 국제교역을 주도하면서 일본 고대국가 발전에도 기여했다.

대가야가 중국`일본 등과 교역했던 물길은 낙동강과 섬진강이다.

낙동강 루트는 회천~낙동강~김해~남해안을 통해 중국과 일본으로 통했다. 대가야가 이용하기 가장 쉬운 길이었지만 신라가 낙동강 하류를 차지하면서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이 때문에 대가야는 서쪽으로 진출해 섬진강 루트를 개척했다. 고령에서 산길로 합천~거창~함양~남원을 거쳐 구례에서 섬진강 물길로 하동~남해안으로 통했다. 각 지방에서는 이 물길을 통해 도읍인 고령으로 갖가지 물품을 들여왔으며, 도읍에서는 이 길을 통해 왕의 명령을 각 지방으로 전달했을 뿐 아니라 고령에서 만들어진 토기와 철기 등 각종 문물을 바다 건너 중국과 일본을 상대로 교역할 수 있었다. 고령군이 경북의 남서쪽 내륙에 위치해 있지만 대가야가 영`호남지역을 아우르면서 일본`중국과 국제무역을 펼치며 해상교역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낙동강과 회천, 섬진강 등의 물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가야시대의 물길은 문화와 문물을 이은 고속도로였던 것이다.

 

◆ 선사시대 암각화의 전래길

고령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부터이지만 본격적인 삶의 흔적이 전해온 것은 청동기시대부터이다.

고령지역에서 청동기시대의 암각화가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인데, 양전리 암각화(보물 제605호), 안화리 암각화(경상북도 기념물 제92호), 지산동 30호 고분 개석암각화, 봉평리 암각화 등이 있다. 특히 이들 암각화 모두가 회천과 안림천, 대가천변에 위치해 주목받고 있다.

고령 양전동 암각화는 대가천과 안림천이 만나 회천을 이루는 고령읍 장기리(지정 당시 개진면 양전리) 알터마을의 산기슭 바위벼랑에 위치해 있다. 이 암각화는 1971년에 발견돼 우리나라 암각화 연구의 효시가 됐다. 암각화가 있는 곳은 지금은 제방이 쌓여 있지만 예전에는 암각화 앞까지 물이 흘러 깊은 소(沼)를 이루었다. 그림이 새겨진 바위면은 가로 6m, 높이 3m 정도의 규모로 그림은 나이테 같은 둥근 동심원과 마치 깃털이 달린 네모진 탈 모양의 그림들이 새겨져 있다. 동심원은 태양을 상징하며 탈 모양의 그림은 신상(神像)을 의미한다. 풍요와 다산, 집단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는 원시 농경사회의 제사 유적으로 추정되고 있다.

안화리 암각화는 양전동 암각화에서 상류 쪽으로 약 3㎞ 정도에 위치한 쌍림면 안화리 안림장터 마을 옆의 안림천변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은 안림천이 회천으로 유입되기 전에 크게 휘돌며 감싸는 곳이다. 바위 벼랑을 이루는 여러 개의 바위면 곳곳에 그림이 새겨져 있으며, 그 형태는 양전동과 유사하다.

봉평리 암각화는 운수면 소재지의 봉평리에서 대평리로 향하는 중간쯤인 순평 마을 뒤편에 있는 야산의 서남쪽으로 뻗어내린 능선 기슭의 끝자락에 있는데 대가천의 충적평야인 순평들과 맞닿은 산기슭이다. 암각화가 그려진 바위면의 전체 크기는 길이 450㎝ 높이 210㎝로 칼과 창을 표현한 그림과 함께 갖가지 그림이 있다. 고령 지산리 30호분 암각화는 현재 대가야왕릉전시관 앞에 위치한 지산동 30호분의 발굴과정에서 확인됐는데 가면모양의 그림과 바위구멍과 선으로 표현한 단순한 형태의 사람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바위그림은 청동기시대 사람들에 의해 그려진 것인데 대가야시대의 무덤인 지산리 30호분의 발굴과정에서 발견됐다는 점이 특이하다. 무덤을 만들던 사람들이 회천 인근의 한 야산에서 암각화가 새겨져 있던 돌을 채석해 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령지역의 암각화는 남해안을 통해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 회천을 거쳐 안림천과 대가천 주변에 정착한 것이다. 고령지역 역사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암각화가 낙동강과 회천을 통해 전래된 셈이다.

◆대가천과 회천이 만나는 곳에 자리 잡은 대가야의 궁성

1천600년 전 대가야 도읍지인 고령읍은 성주에서 발원한 대가천과 합천에서 흘러온 안림천이 만나 회천을 이루는 곳에 있다. 이곳에는 대가야시대 지배층의 무덤인 지산동 고분군과 유사시를 대비해 조성한 주산성, 왕과 왕족을 비롯한 귀족들이 생활하던 궁성지 등이 분포돼 있는데 현재 고령향교 자리가 대가야 궁성지이다.

‘삼국사기’에는 대가야 궁성 성문을 전단문 또는 전단량이라고 불렀다. ‘전단량’은 성문의 이름인데 ‘량’은 ‘문’에 해당하는 대가야 말로 교량, 다리, 들보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 문과 쉽게 뜻이 통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성곽의 모습을 고려하면 '문'과 '량'은 비슷한 뜻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사회는 방어를 위해 성곽 주변에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물을 채운 다음 통행을 위한 교량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출입문은 교량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가야의 궁성이 위치한 고령읍은 회천변에 있는데 이곳에 도시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회천이 고령읍 쪽으로 범람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회천의 범람을 막고 궁성 주변에 넓은 충적지를 확보하기 위해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인공 숲인 ‘적림'(赤林)을 조성했다. 이 적림은 고령읍 도시개발과 경지정리 등으로 지금은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조선시대의 읍지와 옛 지도 등을 통해 그 모습을 대충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옛 지도에 남아 있는 적림은 반달모양으로 고령읍 시가지의 동쪽 부분 전체를 감싸고 있는데 우륵기념탑 부근에서 시작돼 고아리의 치사리마을 앞들에까지 연결돼 지금의 고령 시가지 외곽으로 연결된 순환도로 바깥쪽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숲 길이는 500, 600m, 폭 30, 40m 로 추정되며 적림이 '붉은 숲'으로 해석할 수 있어 적송(소나무)이 주종을 이뤘을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고령읍을 반달처럼 감싸고 있는 600m나 되는 울창한 소나무 숲을 떠올리면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홍수 방지를 위한 옛 선조들의 지혜를 떠올리게 된다.

 

◆고령으로 통하는 물길, 낙동강과 회천

조선초기의 문인이었던 금유는 고령의 형세를 ‘양수요남 군봉공북(兩水繞南 群峰拱北`두 물줄기가 남쪽을 두르고 있고 여러 산봉우리가 북쪽을 감싸고 있다)'이라고 했다.

고령(高靈)의 지명이 산고수령(山高水靈`산 높고 물이 신령스럽다)의 뜻을 지니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택리지'에는 “논(水田)이 아주 비옥해 종자 한 말을 뿌리면 소출이 120~130말이 나오고 적어도 80말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고, 밭에는 목화가 매우 잘돼 이곳을 가히 '의식의 고향'(衣食之鄕)이라 부를 만하다”고 했다.

대가야의 도읍지가 위치한 고령읍은 서쪽과 남쪽으로는 백두대간의 지맥인 가야산과 미숭산을 이은 주산과 맞은편에는 안산인 망산(望山)이 감싸고 있다. 북쪽에는 성주`김천 방면에서 흘러내려오는 대가천이 동쪽을 지나고, 서남쪽에는 합천에서 발원한 안림천이 흘러와 동남쪽에서 대가천과 합류해 회천을 이루며 동남향으로 흘러가 낙동강과 만난다. 또 고령의 동쪽 경계를 이루는 낙동강은 북에서 남으로 흘러 내려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에 위치해 있다.

조선시대에 작성된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각종 고지도와 읍지 등에는 고령의 옛길들이 잘 나타나 있다. 1872년에 작성된 ‘지방도(서울대 규장각)’에는 9개의 옛길이 있는데 크게 4개의 통로로 구분된다.

첫째는 낙동강 통로로, 고령읍에서 동쪽으로 성산면을 거쳐 대구로 나가는 길이다.

둘째는 회천 통로로 개진면의 개경포를 거처 부리의 박석진나루를 건너 현풍으로 가는 길이다. 고령읍에서 회천을 따라 우곡면 객기리의 객기나루를 거쳐 달성군 구지면으로 가는 길이다.

셋째는 대가천 통로로 고령읍에서 운수면을 거쳐 성주군 수륜면으로 가는 길과 본관리를 지나 덕곡면을 거쳐 성주군 수륜면으로 가는 길로 나눠진다. 고령읍 중화리에서 신동을 지나 나상재 고개를 넘어 합천군 야로면으로 넘어가는 길이 있다.

마지막으로 남쪽 방향의 쌍림면을 거쳐 안림천을 따라 합천군 야로면으로 향하는 길이며, 쌍림면 합가리를 지나 지릿재를 넘어 합천군으로 가는 길과 쌍림면 안림리를 지나 구미재를 넘어 합천군 초계면으로 통하는 길로 나눠져 있다.

이와 같이 고령의 옛길은 낙동강과 그 지류인 회천을 따라 연결되어 있다. 지금도 고령을 지나는 26번과 33번 국도나 지방도는 이 물길 옆을 지나고 있다. 선사시대 암각화를 만들었던 그들과 대가야시대 사람들이 다녔던 주요 통로는 1천6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고령`정창구기자 jungcg@ms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