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공원 가야산 아래 위치한 성주군 가천면은 성주 서부지역의 중심지로 교통`산물 교역의 요충지이다. 가천면은 가야산과 형제봉에서 내린 산
능선과 계곡이 대가천에 유입되는 평야지에 터를 잡아 산수가 수려하고 지세가 대가천에서 가장 좋은 명지로 일찍부터 이름이 나 있다. 특히
경상북도의 서남쪽에 위치한 가야산은 경상남도 합천군`거창군과 경계를 이루며, 김천시와 인접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옛날부터 경상도를 대표하는
5일장의 하나였던 천창장이 크게 번성했다.
◆천창장 보러 넘어왔던 가야산 옛길
천장장이 서는 날이면 성주 사람들뿐만 아니라 합천`거창`김천에서도 장꾼들이 몰려와 시장은 항상 북새통을 이뤘다. 도로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가야산 기슭의 천창장을 보기 위해 합천`거창`김천 사람들은 험준한 가야산 고갯길을 넘나들었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산길이 가야산 옛길이다.
해발 800m에 이르는 험준한 가야산 고갯길 가운데 합천 사람들은 코배이재를 넘어오는 고갯길로, 거창 사람은 불기재를, 김천에서는 돌목재를
넘어 천창장으로 왔다. 천창장이 열리던 가천면 소재지 창천리는 원래 ‘샘이 있는 너른 들판’이란 뜻의 샘바대(천평`泉坪)로 불렸으나, 조선 숙종
41년(1715) 목사 윤헌주가 이곳에 양곡 창고인 천야창(泉野倉)을 세우고 지명을 천창(泉倉)으로 바꿨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천창이 일본 발음으로 ‘센소’(戰爭)라 부르니 뜻이 좋지 않아 창천으로 고쳐 부르게 됐다. 이 때문에 요즘도 ‘창천’을
‘천창’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고, 지명을 ‘천창리’로 변경해 줄 것을 요구하는 일도 간혹 있다.
옛 천창장으로 영화를 누렸던 가천면 창천리 장터를 둘러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전성기 때 장날마다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며
흥정소리로 북적거렸을 시장거리. 장꾼들을 불러모으기 위해 씨름판이 열리고 줄광대, 무당굿이 열렸을 공간. 용수(술을 거르는 도구)를 장대에
매달아 놓았던 주막 등 옛 흔적들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고 그 자리엔 현대식 장옥들과 슈퍼마켓이 자리 잡고 있다.
지역 주민들에 따르면 “천창장은 50년 전인 1960년대까지만 해도 장이 서는 1일, 6일이면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로
번창했었다”며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조선시대 향시(鄕市)조에 장시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 장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가야산 옛길을 찾아가는 길
가야산 옛길을 찾아 창천리에서 가야산 쪽으로 포장된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법림마을이 있다. 법림산 아래 있어 붙여진 마을이름이다. 마을
옆에는 폐교된 법림초교가 변신한 고시원이 있고, 그 앞에서 용사`신계리로 올라가는 길과 마수리로 올라가는 길이 갈려진다.
고시원의 좌측 봉우리는 비운의 왕 단종의 태실이 있었던 태봉(胎峰)이 있다. 단종태실은 단종이 태어났을 때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에 있는
세종대왕 17왕자의 태실 한쪽 모퉁이에 마련되었다가 문종조에 세자가 되면서 이곳 법림산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지금은 태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 그 자리에는 민묘가 조성되어 있으며, 주변에 태실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물 몇 점이 널려 있을 뿐이다. “세조가 왕위에 즉위한 후
신하들의 요구에 따라 태실의 석물을 파괴해 버렸다”는 ‘세조실록’의 기록으로 보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단종의 일생을 엿볼 수 있어 마음
한구석이 짠해 온다.
법림마을 이르기 전 샛강 건너편에 점촌(店村)마을이 있다. 그릇 굽기에 알맞은 흙과 옹기 굽는 가마가 있어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이
마을에서 옹기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말기 고종 때 이상룡이란 사람에 의해서였다. 1960∼70년 전까지만 해도 옹기 생산이 이
마을의 주된 산업이었으며, 천창장의 도기점(陶器店) 형성에 한몫을 차지했다.
법림마을을 지나 용사리로 이어진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가야산 아래 끝 동네 신계리와 만난다. 이곳에서는 가야산 정상인 칠불봉이 훤히 보이며
그 아래 산줄기 속에 험준한 고개를 넘나들던 가야산 옛길이 숨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라진 가야산 옛길 자리에는 대형 찜질방과 전원생활을 즐기기 위해 도시인이 지어 놓은 전원주택들만 즐비하게 자리 잡고 있다. 마을 뒤쪽
숲과 맞닿은 곳에 이르자 철문이 길을 막았다. 붉은 글씨의 '출입금지, 위반 시 과태료부과' 플래카드가 돌목고개(回項嶺)를 넘으려는 발길을
멈추게 했다. 신촌을 돌아 불기재와 코배이재를 넘어 거창과 합천으로 가는 가야산 옛길의 성주 쪽 끝 동네인 월남과 갈골마을로 방향을 돌렸다.
월남(月南)은 동네 앞의 시루봉에 가려서 하룻밤에 달이 한 번 뜨고 가야산 쪽으로 돌아와서 다시 달이 뜨는 것처럼 보인다 해 붙여진 이름이다.
동네 뒷산의 불기재를 넘어온 거창 사람들이 천창장을 보기 위해 들락날락하면서 이곳에서 쉬어 갔다는 뜻에서 들리미 또는 덜내미라 부르기도
했다. 갈골마을은 월남의 서쪽에 위치하며 뒷산의 형상이 마치 칡이 얽혀 있는 형상과 유사해 갈골이라 불렸다. 20여 년 전만 해도 30여 호가
사는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떠나 겨우 몇 가구만 남아 있다.
갈골마을을 지나 가야산 상왕봉(1,430m)과 두리봉(1,135m)사이 해인사로 넘어가는 옛길이 나온다. 고개를 오르려면 코를 땅에다 박을
정도로 가파르다고 코배이재(鼻迫嶺)라고 부른다. 가파른 고개를 넘어 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 흔적조차 미미하다.
산 너머 거창 가북과 연결되는 불기재는 아래쪽의 새점마을에서 유래되었다. 새점마을은 철기문화를 꽃피운 풀무간이 있어 불무`불기마을로
불렸으며 거창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불기재라 했다. 이 고개를 넘어가면 하루 만에 돌아오지 못한다고 해서 불귀재라 부르기도 했다.
◆가야산 옛길을 복원해야 한다
‘아큐정전’을 쓴 중국 작가 루쉰은 “원래 땅 위에는 길이란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고 했다.
오랜 역사를 지닌 길이라도 걸어가는 사람이 없어지면 있던 길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가야산 옛길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천창장을 보기 위해 성주군과 인접한 거창`합천`김천 사람들이 높은 고개를 넘나들었던 산길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성주지역은 본격적인 참외생산과 소비패턴이 변화되면서 천창장이 쇠퇴한데다 교통이 발달하면서 걸어가는 사람이 점차
사라졌다. 이 때문에 가야산 옛길은 길로서의 기능을 다해 지금은 등산객들이 이용하는 오솔길만 남게 됐다. 성주군청 박재관(43) 학예사는 “한때
우리 민초들의 삶을 이어주던 가야산 옛길이 사라진다면 그 길에 배어 있는 그들의 희로애락과 역사를 모두 잃게 될 것이다”며 “그렇다고 흔적조차
거의 없는 천창장을 되살려 가야산 너머 사람들에게 옛길을 이용해서 장 보러 오라고 할 수도 없는 만큼 길 위의 주인공인 사람들이 길을 이용하도록
만들어 주는 작업이 우선돼야 한다는 생각이다”고 했다. 그는 “요즈음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등 좋은 길을 선정해 개발한 도보여행 코스가
각광받고 있다”며 “옛길을 탐사하고 필요한 경우 폭을 넓히거나 장애물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사람들이 걸을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옛 선인들의 숨결을
느끼면서 도보여행을 만끽할 수 있는 숲길로 재탄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성주`정창구기자 jungcg@ms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