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팔 산악회

목통령 (옛길기행 매일신문 27. 김천 목통령 넘는길)

대가야고령 2015. 11. 4.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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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9 크게보기 작게보기 프린트 이메일 보내기 목록

어사 박문수 탈진해 실신

마을 아낙네 젖먹고 회생

 

 
민초들의 삶의 길인 깊은 산 속 목통령은 사방이 나무와 풀로 분간이 어렵고 하늘만 빼꼼히 열려 있다. 이제는 찾은 이마저 없어 길조차 형태를 잃어가고 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산길이요, 오직 하늘만이 열려 있다. 깊은 산속 오솔길은 사람들이 자주 넘나들면 뚜렷해지지만 찾지 않으면 수풀로 되돌아 간다. 오솔길은 주로 민초들이 걷던 하늘 길이다. 그래서 생명의 길이요, 정(情)이 깃든 길이다. 김천에는 고단한 민초들의 한숨과 애환이 켜켜이 쌓여있는 목통령(木通嶺) 옛길이 있다.

◆  주민들도 찾지 않는 숨겨진 길

목통령은 김천에서 가장 오지에 속하는 증산면에서 거창과 합천을 넘나들던 길이다. 지금은 잘 포장된 도로 덕분에 자동차로 가야산 자락을 휘돌아 합천`거창을 찾아가지만 옛날에는 지름길인 목통령 길이 유일한 통로였다. 옛 사람들은 해발 999m의 가파른 험로를 마다하지 않고 봇짐을 이고 등짐을 지고 고갯길을 넘었다. 예나 지금이나 길 안내를 해주는 표석 하나 변변하게 마련돼 있지 않다. 이제는 주민들마저 찾지 않은 숨겨진 길이며, 점차 잊혀져 가는 길이다.

목통령에 가려면 성주~무주를 잇는 국도 30호선에서 ‘황점`장전`금곡리’라는 이정표를 만나면 대가천에 가로 놓여진 백천교를 건너야 한다. 다리를 지나면 곧바로 '국가대표 마라톤 감독 정봉수 기념비’가 나타난다. 이 지역 출신으로 나라를 빛낸 황영조`이봉주 등 마라토너를 키워낸 인물이다. 여기서부터 산으로 난 길을 따라 대락 30리(12㎞)를 가면 목통령에 닿는다.

하지(夏至)를 지나 여름 옷을 갈아입은 산천은 짙은 초록빛을 띠고 있다. 잘 포장된 신작로를 따라 가니 들판 논은 벌써 모내기를 마쳤다. 그런데 길옆에 요즘 보기 드문 담배 밭이 여럿 있다. 예전에 이곳은 담배농사를 많이 지었지만 지금은 겨우 5, 6가구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가니 목통천(木通川)의 좌우로 구금곡(舊金谷), 안터(內基), 거물리(巨勿里), 주막뜸, 가정지(柯亭地) 등 금곡리(金谷里)에 딸린 여섯 마을이 차례로 나타난다.

구금곡은 마을 뒤 골짜기에 옛날 큰 금광이 있어 생긴 지명이다. 마을 뒤에는 금광에서 사용하는 화약을 저장해 두던 화약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구금곡 맞은편 산자락의 안터마을은 병자년 큰 수해 때 하천이 범람해 집을 잃은 구금곡 사람들이 비교적 높은 곳인 밭에 집을 지어 살면서 형성된 마을로 금곡리에서는 가장 큰 마을이다.

도로변에는 금곡리(주막)라는 자연석으로 된 마을 표석이 있다. 주막(뜸)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예전에 나그네들이 쉴 수 있는 주막이 있었다. 행인들이 합천 해인사와 성주 천창(가천)장을 가다가 목을 축이던 휴식터다. 마을 주민 하종현 씨는 “천창장에 가려고 새벽 밥을 해먹고 돌목재를 넘나드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 작은 마을 잇따라 길손 맞아

주막뜸을 지나 2㎞ 정도를 오르면 장전리(長田里)로 속하는 청천(淸川), 마구실(馬廐室), 서무터(善武基), 봉답(鳳畓), 도가뜸(都家), 소리재(松溪) 등 작은 마을이 연이어 길손을 맞는다.

마을이 이웃하고 있어 구분하기도 쉽지 않다. 제일 큰 마을인 청천은 마을 앞 목통천이 맑고 깨끗하여 맑을 청(淸)자에 내천(川)자를 써서 청천(淸川)이라 했다고 한다. 또 마구실은 돌목재를 통해 성주로 연결되는 길목에 있는데 말을 키우던 마구간(馬廐間)이 있어 마구실(馬廐室)이라는 지명을 얻었다. 이런 연유로 이 마을에는 말과 관련된 지명이 아직도 남아 있다. 말의 형상을 닮았다는‘말바우’와 만폭정폭포에는 옛날 황점리 죽항마을 앞 하기소라는 물웅덩이에서 솟아난 청마(靑馬)가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서무터'는 조선 말 천주교가 극심한 탄압을 받을 때 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첩첩산중인 이곳으로 들어와 살면서‘선한 가르침을 굳게 믿고 따른다’는 뜻을 담아 선무기(善武基)라고 했다. 뒤에 음이 변해서 ‘서무터’로 불리게 되었다. 안인환(73) 씨는 “고종 9년(1868)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피해 안주원(알로이시오)이 처음 마을에 정착한 후 신앙촌을 형성한 이래 현재까지 전 주민이 천주교 신자다. 서무터공소가 마을의 상징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살고 있는 유서깊은 마을답게 마을로 오르는 좁은 산길 곳곳에 십자가 형상의 기념물들이 이정표 역할을 해주고 있다.

 

◆ 어사 박문수의 발자취 서린 원황점

장전리를 벗어나면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목통령이 시작되는 황점리(黃店里)로 치닫는다. 차량은 교행이 불가능한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면 원황점(元黃店), 대목(竹頂), 초막골(草洞), 돌마당(石場), 문예(文禮) 등 다섯 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형제봉, 단지봉, 세목양지 등 해발 1천m의 험준한 산악지대에 둘러싸여 있다.

좁은 산길을 따라 오르니 목통령 고갯길로 접어들기 전 마지막 마을인 원황점이 눈에 들어온다. 예전에는 20여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겨우 7가구만 마을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원황점 사람들은 옛날 유황을 캐서 나라에 공물로 바치는 일을 주업으로 해 황점(黃店)이라고 불리웠는데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진다.

어사 박문수가 김천 암행을 마치고 경남 거창을 가기 위해 이 마을을 지나 목통령을 넘게 됐는데 워낙 험준한 고개인 탓에 탈진해 쓰러졌다. 산나물을 캐러온 마을 아낙네가 박 어사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자신의 젖을 짜먹여 살렸다. 목숨을 구한 박 어사가 생명의 은인에게 소원을 물었고 아낙은 “마을 사람들이 대대로 독한 유황을 캐고 나라에 바치는 일로 지극히 고단하니 이를 그만두게 해달라”고 하소연을 했다.

어사 임무를 마치고 상경한 박문수가 영조에게 사정을 말했다. 영조는 “부인의 정성이 나라의 동량을 살렸다”고 소원을 들어줬고, 이후에는 유황을 상납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마을 뒤쪽에는 황을 캐던 자리가 있는데 주변에 바위`돌 등은 누렇거나 붉은색을 띠고 있어 이곳에서 유황이 생산됐음을 짐작케 하고 있다.

◆길 자취조차 사려져 안타까워

원황점을 지나면 비포장길이다. 차가 돌부리를 넘으면서 요동치며 기우뚱한다. 여기서부터는 김천 ‘모티길’로 요즘 웰빙 열풍을 타고 인기를 얻고 있다. 임도로 개설됐으나 지금은 전국에서 많은 등산객이 몰려든다. 원황점에서 천년고찰 수도암까지 연결(15㎞)된 모티길은 구비구비 도는‘모티'가 아흔 아홉 개로 셀 수 없을 정도로 이어지고 주변 경치가 볼 만하다.

모티길을 접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아 길 안내자가 차에서 내리기를 재촉한다. 차를 버려 두고 본격적으로 목통령 옛길 탐방에 나섰다. 막상 차에서 내려 산속으로 들어섰으나 숲인지 길인지 구분할 수 없다. 이방인의 길 안내에 나선 동네 청년이 이끄는 대로 개울을 건너 풀숲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낫으로 길을 내며 한참을 올라가니 비탈길이 어슴푸레 드러난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다니던 길이었지만 인적이 끊긴 탓으로 길 형태를 온전하게 간직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길은 주위보다 낮게 다져진 탓에 물길이 길을 내고 있다. 사방을 둘러보니 나무와 풀로, 온통 초록이다.

하늘만 빠끔히 열려 있다. 드문드문 등산객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매어 놓은 빛바랜 리본에서도 새삼 정겨움이 묻어난다. 30여 분을 오르니 벌써 숨이 차다. 예전에 이 길을 걸었던 민초들은 등에 나뭇짐을 지고 머리에 봇짐을 이고 길을 재촉했지만 제 몸하나 옮기기도 벅차다. 줄곧 증산에서 나서 자란 문상만(56) 씨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목통령을 넘어 합천 해인사로 1박2일 수학여행을 갔다”며 “당시에는 길이 선명했는데 지금은 겨우 흔적만 남았다”고 아쉬워했다.

정상에 가까워지자 길이 코에 닿을 듯 가파르다. 땀이 비오듯 하고 숨소리가 거칠다. 해발이 높아질수록 잡목은 사라지고 나무의 키가 낮아진다. 눈앞에 산죽(山竹) 군락지가 위용을 드러낸다. 산죽을 한참 헤치고 길을 재촉했는데 안내자가 길을 잃었다. 잠시 숨을 돌리기로 하고 목을 축였다. 생수는 어떤 감로수와 비할 바가 아니다. 문득 학창시절 교과서에 실린 프로스트의 ‘가지 않는 길’이 떠올랐다. 다소 전하는 의미는 다르지만 전인미답의 길을 찾아간다는 생각에 다시금 힘이 솟는 것 같다.

길 안내자가 고갯길 꼭짓점인 목통령에 다다랐다고 환호한다. 목통령 정상은 어릴 때 넘던 여느 시골 고갯길과 별반 다름이 없다. 목통령 한켠에는 무너진 돌무덤 같은 성황당이 나홀로 목통령을 지키고 있다. 길 가던 나그네가 돌을 던져 무사하게 산을 내려가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던 곳이다. 목통령에는 주변 가야산, 수도산 등 험준하고 높은 산이 즐비해 호랑이`늑대 등 짐승의 출몰도 흔했다고 전한다. 정상에 더위를 식혀주는 한줄기 바람이 불어와 힘든 산행을 위로하는 듯하다. 얼마 전까지 민초들의 삶의 통로인 목통령이 지금은 길 자취조차 사려져 가는 안타까움에 마음이 짠하다. 최근 지리산 둘레길이 각광을 받듯이 목통령도 가야산, 수도산 등과 연계된 등산로로 정비돼 사람들이 즐겨 찾는 길로 거듭나기를 기대해 본다.

김천`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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