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팔 산악회

지리산의 옛 모습

대가야고령 2015. 10. 16. 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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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

1970년까지만 해도 이런 초막이 대피소 역활을 했다..지금의 대피소 자리에 있던 1955년의 노고단 초막의 모습

 

1970년대의 노고단 주변의 야영객들...얼마나 자연을 훼손 했을까...그자리에도 고교시절 저기에 있었다 한다...

 

1972년에야 현대식 건물로 노고단 대피소가 지어지고 지금 피아골을 맡고 잇는 함태식 선생이 1987년까지 운영을 하셨다고 한다..

그 뒤 지금의 대피소가 지어지면서 함 선생은 피아골로 옮기시고...사진 가운데 검은 셔스를 입은 분이 함태식 선생....세월 무상이다...

 

(세석)

지금의 세석 산장 터에 있던 야영장..무분별한 야영과 취사로 철쭉 군락지는 사라져 가고..

1972년 부터 시작된 세석 철쭉제는 이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단다..23년간 진행되다가 1995년에야 철쭉제는 없어지고...

가운데 사진의 건물이 지금의 취사장 건물로 당시의 대피소 역활을 했단다..수요를 예측 못하여 초래한 결과...

마지막 사진은 영신봉의 모습이다..사진으로 봐서는 지금의 화장과 헬기장 부근이 야영장 같았다...

 

1972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던 해 지금의 취사장 건물에서의 우천 허만수 선생과 거림쪽으로 2km아래에 있던 우천 선생의 초막..

우천 선생은 지리산이 망가지는 것을 바라 보다가 1975년에 칠선계곡으로 들어 간다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지셨다...

 

1972년 당시의 장터목 산장과 제석대..지금의 모습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주목이 그런대로 빽빽했다..

장터목 산장도 1995년에 지금의 최신식 건물로 중축하고..위 사진의 아래쪽에 자리 잡았다..

 

(천왕봉)

1970년까지 천왕봉을 지키던 김순용옹..천왕봉 아래 움막에서 기거하며 마애불과 성모상을 지켰는데..

마애음각상은 도난후 행방이 묘연하고..성모상은 머리가 두 동강나서 버려진 것을 수리하여 중산리 천왕사에 모셔져 있다..

 

천왕봉 정상석..전국의 산악인이 반발하여 경남인이라는 글씨를 한국인으로 바꿔서 지금에 이른다...

 

한국인의 기상 이 곳에서 발원하다

天王峰 정상 표지석 뒷면에는 “韓國人의 氣象 여기서 發源되다”라고 음각되어 있는데 원래는 이곳에 있던 표지석에는 남명 선생이 읊었다고 하는 “萬古天王峰 天鳴猶不鳴”(하늘이 울어도 아니 우는 뫼)이라는 시구가 적혀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980년대 초 5공 실세이면서 경남 산청/함양의 지역구 국회의원이던 권익현씨가 이곳에 정상표지석을 세우면서(천왕봉의 지적은 경남 산청군이다) “慶南人의 氣象 여기서 發源되다”고 적어놓은 것을 후에 慶南人이 嶺南人으로 바뀌고, 다시 嶺南人이 韓國人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정상표지석 후면을 눈여겨보면 그 흔적을 역력히 볼 수 있읍니다.

 

(치밭목)

 

폐허로 방치된 건물을 진주 산악인인 민병태씨가 수리하고 보수하여1987년부터 20년째 운영해 오고 있다..

지금의 건물과 뼈대는 같고 겉만 보수하여 사용하고 있다..민병태씨가 당시 35살에 지리산에 홀로 들어와 지금은 55살이니..

지리를 좋아 하지 않았으면 하지 못 할 일이였을게다...지금도 별로 돈이 않되는데...입구의 현판은 지금도 같은 자리에 결려있다..

 

예전 사진을 보면서..

요즘의 대피소가 자연을 훼손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가 없다...

세석이나 노고단의 옛 사진에서 보듯이..무분별한 야영과 취사로 지리산이 망가져 있는걸 목격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앞으로 비박이나 취사 시..보다 신중하고 깨끗한 야영과 취사로 지리산을 가꿔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