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팔 산악회

[스크랩] (스크랩)지리산의 옛모습 3 - 대피소의 옛모습과 노고단

대가야고령 2015. 10. 16. 06:18

 대피소의 옛 모습과 노고단

 

 

 장터목 대피소 신축 모습(1996)

                 벽소령 대피소 신축 모습!

                   

  

 

 

세석 대피소 아래 있었던 지리산 신령 우천 허만수선생 의 초막 

 

지금의 세석 대피소 (국립공원 대피소중 가장 규모가 크다.) 

 

지리산 중산리에 있는 우천 허만수 선생 추모비 

 

세석평전에 터를 잡았던 인물 중 가장 최근의 인물은 우천 허만수 선생이다.

1916년 진주에서 태어난 우천은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산의 매력에 푹 빠진다.

고국에 돌아온 그는 의령 자굴산에서 토굴생활을 하던 중 30대 중반의 나이로 지리산에 입산

토굴생활을 전전하다가 세석평전에 초막을 마련하는데 이 초막은 훗날 세석대피소의 전신이 된다.

초창기의 우천은 벌목공이나 짐꾼같은 잡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나중에는 지리산을 지키는 일에 솔선수범하였다.

미개척된 등산로를 개척하고 지리산 등산 지도를 만들어 등산객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였으며

 태풍에 낙오한 사람들을 자신의 초막으로 대피시키고 무사히 하산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하였다.

 

1976 6월에 우천 허만수는 마침내 종적을 감춘다.

우천은 바람처럼 살다가 칠선계곡에서 묻히고 싶다고 말을 했는데 그 말을 증명이나 하듯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정선중 著 '살아서 꼭 가봐야 할 지리산 여행' 중에서

 

 

세석 평전의 옛모습 1   

                세석 평전의 옛모습 2

 

세석 평전의 옛모습

                   옛 세석 산장 4  (현 세석대피소 취사장)

 

                                   1930년대 노고단

 

 1969년 여름 노고단 이화여자대학교 기증 지리산악회 제작 지리산 안내 간판 

   

     이화여자 대학교 기증 지리산악회 제작 지리산 안내 간판 설치 후 

                          1950~1958년 노고단 돌탑

 

                            1964년 여름 노고단 산막앞

    

                 1965 8월 노고단 야영장 (연하반 하계 야영) 

                     출처 -연 하 반 (烟霞伴) cafe.daum.net/guryeyeonhaban

69년지리산 종주 세째날 아침 노고단 대피소(불에타 임시로 지붕을 수리함)  

(뒤 쪽의 벽돌건물이 일제 때 외국인 선교사 별장터)

 

노고단 작전도로에서 선교사 별장터를 배경

1979년 노고단산장.

 

 

 

노고단(老姑壇)


천왕봉과 더불어 노고단은 우리민족의 영원한 믿음의 성지로 전해져 오고 있다.

동서로 1백리라는 거리를 두고 떨어져 솟아 있으면서 지리산이란 큰 궤를 같이하며

우리 민중의 추앙을 받아온 민족신앙의 영지(靈地) 남아있다.

해발 1,507m로 일명 고선봉으로 불리는 노고단은 서남방향으로 1718도의 완만한

경사지대로 대략 35만평 규모의 고원지대다.

 

  신라시대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지리산 산신으로 받들고

나라의 수호신으로 모셔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올리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제사는 선도성모의 사당인 남악사를 세워 올렸는데 지금은 화엄사 앞으로 옮겨져

구례군민들이 해마다 곡우절을 기해 약수제와 함께 산신제를 올리고 있다.

 

남악사의 유래는 "삼국사기" 제사 부분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삼산과 오악 이하의 명산대천에 대사 중사 소사의 제사를 나누어 지냈는데

중사를 지내는 오악은 동쪽 토함산,남쪽 지리산,서쪽 계룡산,북쪽 태백산,중앙 부악

(팔공산)이라고 적혀 있어 지리산은 남악으로 정해져 제사를 올리던 명산이었다.

 

제사를 올리던 곳이 노고단이며,이처럼 국가차원에서 제사를 올린 의미는 무엇인가.

사학자들은 당시 이같은 국가의식을 민중들이 받들던 성모신앙과는 그 의미가 다른

것으로 주장하고 노고단에 남악사를 세워 국가차원에서 의식을 진행한 것은 민중들

별도 성모사당인 성모사를 위압하려는 측면도 있었을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신라 시조의 어머니를 모시는 남악사를 세워 민중 차원의 성모신앙(무속신앙

큰흐름)국가차원에서 흡수하려 했던 것으로 보아 진다는 것이다.이러한 제례는

신라이후 고려 조선을 거쳐 변함없이 면면히 이어져 왔으나 구한말 융희2 (1908)

폐사된 것으로 전해진다.


남악사는 지난 69 12월 전라남도와 구례군에 의해 화엄사 앞에 복원됐다. 신라시대

이전부터 우리민족과 함께 운명을 같이해온 노고단은 화랑의 심신수련장으로 널리 활용

된 것으로 전해진다. 멀리 천왕봉까지 오가며 심신을 수련하던 화랑의 높은기상과 기개

(氣槪)아직도 노고단 언저리에 남아 있는 듯 하다.


민족의 안식처로 기개를 단련하던 노고단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수난의 아픔을 겪는다.

민족신앙의 성지이며, 낙원이던 이 곳이 일제시대때 외국인 선교사들의 피서용 별장으로

둔갑한 것이다. 한여름에도 시원하고 맑은 물이 샘 솟아 내를 이루며 빼어난 절경을

간직한 이곳에는 당시 외국인 별장이 52동이나 들어섰다 한다.

 

더욱이 구례지방에서 조선인 인부들은 벽안의 선교사들을 가마에 태워 이곳 별장까지

오르내렸다 하니 당시의 서글픈 시대상황이 안타깝기만 하다.

 

더욱더 아픈 마음은 거룩한 민족의 성지를 개발의 잣대로 보는 치자와 그를 이용하는

정치인.시정잡배.몰쌍식한 일부종교인들이 성지를 까 부수고 케이불를 설치하여 훼손

하려하는데 무지몽매(無知蒙昧)한 군상(群像)들은 파리떼처럼 날라 다니기만 한다.

 

 

 

옛날 로타리 대피소의 모습입니다.  지금의 모습과는 사뭇다른 느낌이네요!

  

쓰레기를 지게로 져서 내리는 모습

 

1966년 반야봉님,[길상봉 돌탑 ]

 

신선너덜에 있었다고 하는데..

 

1956년 이승만 화엄사 방문기념 사진

출처 : 산 노 을
글쓴이 : 무적강철군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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