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산행

가장 깊은 마을 "원황점"과 가장 높은길 "모티"

대가야고령 2012. 9. 14. 15:08

[慶北의 재발견 .19]

 김천, 가장 깊은 마을 ‘원황점’과 가장 높은 길   ‘모티’ 박현주기자

  • 2012-09-14 08:25:29 

민초의 간난고초 스민 곳…숲길은 이토록 아름다워도 되나

(가난고초(艱難苦楚) : 몹시 힘들고 괴로운 일)

모티길에서 바라본 산 아래 전경. 멀리 장전마을이 보인다. <박광제 한국예총 김천시지부장 제공>
소백산맥과 가야산맥의 분기점인 대덕산에서 동으로 뻗어나며 수도지맥을 이루는 수도산(1천317m), 단지봉(1천327m), 좌일곡령(1천258m), 목통령(1천10m), 두리봉(1천135m) 등 해발 1천m급 고봉에 에워싸여 있는 증산면은 김천에서 가장 높은 곳이며, 가장 깊은 두메산골이다.

그러니 수도산 가슴께의 수도마을과 목통령 발 아래의 원황점마을은 가장 깊은 마을이고, 그 위쪽의 ‘수도산 모티(모퉁이의 경상도 사투리)길’은 가장 높은 길이다.

수도산~단지봉~좌일곡령~목통령의 7부 능선을 가로지르며 35리(15㎞) 넘게 나 있는 모티길.

이 길에 들어서면 간난한 삶을 부여잡은 민초들의 거친 숨결이 느껴진다. 험하고 외진 산을 무대로, 힘겹게 살다간 이들의 짙은 우수가 연상되는 이 길을 ‘모티길’로 명명한 게 우연만은 아니지 싶다.

산은 오랜 세월동안 민초들의 노역장이었다. 그러나 스님네를 보듬어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대원력을 세우게 했고, 주린 중생에게는 억센 나물이나마 기꺼이 내어 주며 그들의 역사가 이어지게 했다.

수도산 모티길. 가끔 삶의 무게가 버거울 때 한 번쯤 걸어 볼 만한 길이다. 산에 의지해 살다 간 사람들의 잡초처럼 강인한 생명력이 가슴에 와닿는 듯한 길. 혼자서 뚜벅뚜벅 걷기에 더 없이 좋은 길. 10월이면 수도계곡 단풍도 만날 수 있을 게다.



◇ 원황점 마을
조선땐 유황으로 일제땐 조림으로 긴 노역의 역사…
어사 박문수가 목숨 구한 일화도


◇ 녹색숲 모티길
수도∼원황점 연결 30m급 낙엽송 3㏊ 전국 최대 보존림
‘아름다운 숲길’과 단지봉 철쭉군락도 놓칠 수 없는 풍광
인현왕후 머문 청암사 등 가볼만



원황점마을. 2002년 입은 태풍피해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말끔히 정비돼 있다. <박광제 지부장 제공>
모티길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낙엽송 군락. <박광제 지부장 제공>
◆ 유황·조림·수해…원황점마을

원황점마을로 자락을 늘어뜨린 목통령은 마을에 몇 뙈기의 밭과 다랑논을 줬을 뿐 넉넉함을 허락하지는 않았지만, 유황을 줌으로써 유황을 정제해 나라에 공납하고 식량따위를 받아 근근이 연명하게 했다.

취토(取土), 취회(取灰), 교합(交合), 사수(篩水), 오수(熬水), 재련(再煉), 삼련(三煉), 합제(合製)의 여덟 단계순으로 까다로운 공정을 거쳐야 정제되는 유황은 당시의 주요 군수품으로, 유황을 만드는 이들에 대한 나라의 관리는 대단히 엄격했을 터이다. 이들은 대를 이어가며 유황을 생산해야 하는 국법에 묶여 있었다. 속박된데다, 구차하기가 그지없는 생활에서 벗어나는 게 자연 이들의 소원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 해인가 마을 뒷산으로 산나물을 찾아 나선 아낙이 탈진해 쓰러진 낯선 남정네를 발견하곤 젖먹이에게 줄, 불어난 젖을 짜 먹여 기운을 차리게 했다.

이 남정네가 바로 거창을 향해 목통령을 넘으려던 암행어사 박문수다. 그는 아낙으로부터 마을의 딱한 처지를 듣고는 임금(영조)에게 청원해 이들이 황을 캐는 일에서 헤어나게 했다. 한 아낙의 젖보시로 천형같은 고통에서 벗어난 마을의 지명 원황점(元黃店)은 ‘원래 황을 캐던 곳’이라는 뜻이다.

원황점의 후예들에게는 일제강점기에 엄청난 환란이 연이어 찾아 온다.

김천에서 농업과 운수업으로 돈을 모은 나카가와 다이헤(中川太平)는 수도지맥 일대의 국유림 4천884만3천195㎡(4천925정보)를 사유화해 당시 전국 최대 규모의 조림을 시작한다. 조림사업은 원황점마을과 그 아랫마을 장전, 산 너머 수도마을 사람까지 동원한 가운데 1918년부터 본격화됐다. 일제가 침략용 철도 침목과 전신주로 쓸 목재를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한 방편으로 일본인에게 사업권을 주고 추진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당시의 조림사업은 전나무, 낙엽송, 오동나무 등 700만 그루를 심게 한 것도 모자라 가야산까지 원정을 다니며 조림을 하게 하는 등 무려 20년간이나 계속됐다. 주민들은 이 기간동안 1천m급 산을 헤집고 다니며 잡목을 베어 내고, 그 자리에 묘목을 심는 등 노동력을 수탈당한 것으로 보인다. 자료에는 임금을 보리쌀, 밀가루 등 식량 형태로 지불한 것으로 나타난다. 노동력 유지 차원에서라도 연명거리는 당연히 줬을 것이다.

이후에도 주민들은 조림지를 관리하는 등 노동력을 제공했으나, 목재 수송을 위한 철도부설계획이 태평양전쟁으로 추진력을 잃는 바람에 철도공사장 부역을 면하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 와중에 1936년 원황점마을은 복구조차 불가능한 엄청난 수해를 입고 마을 전체가 골짜기 상류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주한다. 근래 들어선 2002년 태풍 루사가 또 다시 이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당시 취재차 찾은 원황점은 산에서 휩쓸려 떠내려온 집채만한 바위와 뿌리째 뽑힌 고목이 뒤엉켜 있을 뿐 마을의 흔적은 온데간데 없었다.

개인사도 아니고, 한 마을의 내력이 이처럼 드라마틱할 수도 있을까?

주민의 입장에서 유황과 조림 때문에 겪은 고초를 산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산을 떠나지 않았다. 고통은 산이 아니라 사람이 주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으리라. 오히려 삶의 무게가 부칠 때마다 산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 안겼을 것이다.


완만한 내리막으로 이어지며 원황점마을을 향하는 모티길. <박광제 지부장 제공>
1천m급 산의 7부 능선을 가로지르며 이어지는 모티길. <김천시 제공>
◆ 녹색숲 모티길

‘수도 녹색숲 모티길’은 목재를 나르는 임도다. 높낮이 편차는 150m 내외로 비교적 완만해 크게 힘들이지 않고 걸을 수 있다. 이 길은 수도마을과 원황점마을을 이어준다.

수도마을에서 출발하면 초입의 오르막길을 지나 오르내리기를 몇차례 반복(30여분 소요)한 후 완만한 내리막길을 따라 수월하게 완주할 수 있으며, 원황점마을에서 출발하면 그 반대의 경우가 된다.

전구간 15㎞를 걷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성인을 기준으로 4~5시간이면 넉넉하다. 그러나 모티길만 걸을 게 아니라 수도지맥의 속살까지 볼 요량이라면 하루 낮 정도의 시간은 내야 한다.

경사가 심해 콘크리트 포장을 한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황톳길과 자갈길로 이어진다. 길 중간 중간에는 아름드리 낙엽송, 전나무, 잣나무 군락지와 수백년 된 참나무에 기생하는 겨우살이, 산죽, 각종 야생화 등 볼거리가 심심찮게 널려 있다.

1930년에 심은 30m급 낙엽송이 이룬 숲은 전국 최대의 ‘낙엽송 보존림’으로 3㏊ 규모다. 당시 조림에 동원됐던 사람들의 수고로움이 피부에 와닿는 곳이기도 하다. 산 정상부에서 발원된 개울물이 모여 흐르는 곳곳의 계곡도 볼거리로 부족함이 없다.

김웅규 남부지방산림청 숲해설사는 산림청이 개설한 ‘아름다운 숲길’을 꼭 걸어볼 것을 권한다. 천연림에 가까운 숲의 정취를 맛보며 산림욕을 즐기기에 딱 좋다는 것이다.

수도리에서 출발해 모티길 초입의 자작나무숲과 산불감시초소를 지나 왼쪽으로 접어드는 ‘아름다운 숲길’은 1950~60년대 벌목꾼들이 통나무를 원시적인 방법으로 나르던 오솔길이 원형대로 있거나 그대로 복원한 숲길이다.

수령 70~80년은 족히 되는 잣나무와 낙엽송 밀림을 관통하며 단지봉을 향하는 아름다운 숲길은 3㎞에 걸쳐 이어지다 모티길과 다시 만난다. 아름다운 숲길은 전구간을 비포장으로 관리하며 오솔길의 운치를 살리고 있다.

아름다운 숲길을 벗어나 모티길로 접어들면 곧바로 단지봉 등산로(수도마을 기점 3㎞ 지점)와 마주친다. 약 1시간30분에 걸쳐 2㎞ 남짓 오르면 철쭉군락의 별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분지형 정상 3만3천㎡ 가량의 공간에 펼쳐진 철쭉 군락은 5월 중순에서 하순까지가 절정으로, 가야산·매화산·덕유산 등 인근의 명산에다 쾌청한 날이면 멀리 지리산 천왕봉까지 미치는 조망권과 함께 단지봉이 정상에 오른 사람에게만 주는 특별한 선물이란다. 그러니 철쭉의 절정기에 모티길을 찾으려거든 단지봉은 꼭 오를 일이다.

김웅규 숲해설사는 “단지봉에서 능선을 따라 동으로 종주하다 좌일곡령· 용바위· 목통령의 기암괴석을 구경한 후 내려와 모티길을 따라 원황점마을로 하산하라”고 권한다. 지리산, 설악산, 덕유산과 더불어 국내 4대 종주코스의 하나인 수도·가야지맥 종주의 묘미를 조금이나마 맛 볼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산을 오르는 맛을 제대로 보려거든 되짚어 내려와 모티길을 걷다가 수도리 기점 8㎞ 지점에서 샛길을 따라 좌일곡령에 오르라고 했다. 거리가 1㎞에 불과해 1시간 남짓이면 오를 수는 있으나, 전혀 정비되지 않은 가파른 원시의 길이라 있는 힘을 다 쏟아부어도 부칠 것이라고 귀띔했다.

모티길은 다소 무뚝뚝한 느낌도 준다. 곳곳에 벌채를 하는 바람에 당초 기대했던, 전구간에서 원시림같은 숲의 정취를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그러나 벌채로 인해 넓혀진 조망권과 군데군데의 아름드리 나무의 군락, 지천으로 피어 있는 야생화는 실망을 상쇄할 요인이다. 그러나 둘레길이 아닌 데서 오는 교통문제 등 불편함이 적지 않다.

증산면에는 일찍부터 가람이 자리 잡았고, 특히 쌍계사는 면 소재지 옥동마을 전체를 경내에 뒀을만큼 대가람이었으나 6·25전쟁때 패주하던 북한군이 불을 지르는 바람에 소중한 유적과 함께 소실됐다. 신라 헌안왕 3년(850)에 창건돼 소실되기 전까지 1천100년 동안 중생을 제도했다.

청암사는 쌍계사와 같은 해 산내 암자로 창건됐다. 1689년 지아비 숙종에게 내쳐진 인현왕후가 복위하기까지 일정 기간(3년)을 머물렀던 사찰로, 1660년 강원이 개설된 이래 현재의 청암사비구니승가대학까지 꾸준히 맥을 이어 온 불교강원으로 유명하다.

두 사찰과 비슷한 시기(859년)인 수도산 8부 능선(1천80m)에 자리잡은 수도암 역시 쌍계사 산내 암자로 창건됐다. 통일 신라 말기의 문장가 최치원이 해인사와 더불어 화엄종 10대 명찰에 선정할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청암사에서 수도계곡을 거쳐 수도암에 이르는 길은 드라이브 코스로도 제격이다.

김천=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