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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연경동 구간 동화천 변에 솟은 화암. 그 바로 북편에 이숙량이 학문을 가르치던 서당이 있었고, 그 서당은 얼마 후 대구 최초의 서원이 됐다고 했다. 화암 북동편에는 '서원연경' 마을이 펼쳐져 있다.
앞서서도 살폈듯, 고려시대에 영남은 변방화 됐던 듯 했다. 왕건의 통일 이후에도 계속해 부귀영화를 누린 영남인은, 일찍부터 왕건의 편을 들어 군사를 이끌고 통일전쟁에 동참했던 소지역별 할거세력들, 신라라는 나라를 갖다 바쳤던 마지막 왕 김 부의 후손들, 새 정권에 동참한 신라 육두품 인사들 정도였던 것으로 전문가들은 파악했다.
하지만 그런 현실은 바로 지역 인재의 유출을 의미하고, 경주를 중심으로 한 영남권의 공백화를 말하는 것이었다. 신라의 지식인층이었던 육두품 인사들은 아예 개성으로 이주해 가 버렸다. 최언위는 왕건의 태자 사부가 됐고, 김 부를 따라 갔던 최은함의 아들 최승로는 시무 28조로써 고려의 기반을 공고히 하는데 앞장섰다. 이에 현종은 최치원을 문창후(文昌侯), 설총을 홍유후(弘儒侯)로 추봉함으로써 우리 유학의 도통을 신라 중심으로 확립하기도 했다.
'경상도 700년사'(경상북도) '영남사림파의 형성'(이수건) 등에 따르면, 그 후 광종 대에 과거제가 도입되고 성종이 향교(향학)를 세우는 등 지방 진작책을 쓰긴 했으나, 그마저 최충으로 상징되는 '사학'(私學)의 득세로 약화됐다. 개성 중심이자 귀족 중심이던 사학은, 자연스레 관학과 지방교육을 쇠퇴케 했다. 그렇게 해 폐쇄성이 강화된 뒤 문종 이후에는 문벌귀족사회가 확립되는데 이르러, 지방 출신들의 과거 합격률조차 폭감했다. 더불어 유학도 경전을 중시하던 '존경풍'(尊經風)에서 문장력 중심의 '사장풍'(詞章風)으로 변질됐다.
경상도의 문풍 회복 및 명문거족 배출 기반 마련에 전환점이 된 것은, 1170년 발생한 무신정변이었다. 그 일로 문벌귀족과 문인들이 타도돼 지방으로 낙향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택한 지역 중에서는 경상도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오세재는 경주로, 임춘은 예천으로, 이승장은 상주로 내려 왔다. 이제 공부를 하려면 개성이 아니라 경상도를 찾아와야 할 정도로 상황이 역전된 것.
이들이 경상도를 택한 것은 황무지가 많아 개간 정착의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땅 외에 노비가 매우 중요한 경제 수단이어서, 땅이 없어도 노비만 있으면 논밭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고 했다. 경북 북부 산간지에서 점차 명문거족이 많이 탄생하게 됐던 것이 이런 사정에 연유했다. 그리고 지식인층의 이동 정착과 비슷한 시기 경상도의 각 지방에도 중앙관리가 파견되기 시작함으로써, 이들 또한 지방 교육 활성화에 기여했다. 지방에 독서층이 두터워지게 됐고, 책 수요가 늘자 인쇄술이 덩달아 발달하기도 했다.
그러한 인사들에 의해 드디어 '경상도 제자'가 육성돼 점차 중앙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최우 등 무신정권이 새 계층의 발탁에 나선 덕분. 경상도의 호장(戶長)층이 사대부 집안으로 성장하고, 경상도를 본관으로 하는 명문거족이 탄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흔히들 좋잖게만 보는 무신정권이 지역민에겐 이익 준 측면을 가졌고, 그렇게들 경도하는 왕건은 그 반대인 면을 지녔다니,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셈이다. 이런 기회에 사대부로 성장하지 못한 호장 세력은 조선조 이후의 신분 고착화로 아전화 됐다니, 그 또한 주목해 둘 일이라 싶다.
새로 등장한 사대부 계층이 새롭게 채택한 학문은 '신유학'이었다. 경전의 해석에 매달리던 훈고학과 달리 철학적 사고를 진행시키던 성리학이 그것. 신유학은 당시 원나라가 새 통치이념으로 삼아 전담 기구까지 만들어 널리 퍼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경상도에서는 그 새 학문을 수용할 기반이 어디보다 먼저 개척되고 있었다. 안강 출신 재야지식인 안치환이 사장풍을 비판하고 고문운동을 전개해 '문이재도'(文以載道)를 주창하던 것이 친성리학적 성향의 대표적 증좌. 오세재와 임춘은 '죽림칠현'이라 불리던 인사이기도 했다.
중국에 머물던 우리 신진들이 자연스레 신유학을 접하게 됐고, 그 성과는 경상도로 전파됐다. 원의 관련 기구 소속원으로서 1290년 이를 가장 먼저 국내에 도입한 안향(安珦)은 영주 순흥 출신이었다. 그리고 상주·경주 등의 지방관을 역임함으로써 경상도가 성리학의 중심지 될 소지를 마련했다. 안향에 이어 더 실제적으로 성리학 지식을 도입한 백이정(白 正)은 비록 지역 인사가 아니었으나, 그의 학문을 경주의 이제현(李齊賢), 안동의 권부(權溥), 영해에서 활동했던 우탁(禹卓) 등이 전수해 영남에 뿌리깊게 했다. 나아가 이제현은, 원나라에 머물며 '만권당'을 운영하던 충선왕에게 불려 가 10여년간 현지 학자들과 교류함으로써 성리학을 제대로 소화 흡수한 최초의 국내 인사로 육성됐다.
이제현의 학문은 외가인 영해에 깊은 연고를 두고 있던 목은 이색(李穡)에게 이어졌다. 자신도 원나라에서 3년간 유학했던 학자. 성균대사성 등의 직책에 있으면서 10여살 아래의 포은 정몽주와 20여살 아래의 도은 이숭인 등을 교관으로 지휘하기도 했었다. 목은의 학맥은 권근 변계량 등으로 이어져 조선 개국에 동참했던 '관학파'를 형성한다.
관학파의 영향을 팔공산권에 유포한 중요한 인물은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 1388∼1443)이었던 듯 하다. 태재 신도비, 후손, 연구서 등에 따르면, 목은의 손녀를 어머니로 해서 개성에서 태어났던 그는 목은의 제자이던 변계량과 권근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하지만 관찰사를 지낸 그의 아버지가 옥사에 연루돼 주살된 뒤 22살 때 팔공산 자락인 영천시 청통면으로 귀양 와 '태재'라는 정사를 지어 제자를 양성했다. 원촌리에 자리 잡고 '북습(北習)서당'을 운영했다는 기록도 있다 하니, '태재'라 불렀던 것이 곧 그 서당이었던 듯 했다.
☞ 팔공산권에 유배 와 많은 제자를 길러냈던 유방선을 주향으로 한 송곡서원. 사진 뒤로 보이는 것은 그의 신도비이다. 지금 서원이 옮겨져 있는 애련리는 3개 자연마을로 구성됐고, 전에는 사과 농사를 했으나 지금은 자두와 매실 중심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그 서당은 나중에 '송곡(松谷)서원'으로 승격됐으나 대원군 때 훼철됐다가 1961년 청통면 애련리로 옮겨져 재건됐다. 하양→신녕 도로의 은해사 분기점에서 바로 갈라져 들어가는 큰 골 안의 마을. 서원이 이곳으로 옮겨 재건된 것은, 일대에 '서산 유씨(瑞山柳氏) 영천파'라 불리는 태재의 후손들이 많이 살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태재 본인은 나중에 강원도 원주로 옮겨 가 살다가 생을 마쳤다고 했다. 그는 두시학(杜詩學)에도 뛰어났으며, 대사간을 지낸 아들과 조카 등이 그 학식을 전수해 '찬주분류두시' '두시언해' 등의 국가 저술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애련리에 있는 송곡서원의 주향은 태재, 배향은 이보흠이라고 했다. 영천 출신의 이보흠(∼1457)은 서민을 위한 촌락 단위의 구휼조직 '사창'(社倉)의 창설 운영에 애정을 기울여 대구 군수로서 큰 기여를 한 사람. 배향으로 보면 이보흠이 태재의 맏제자일 가능성이 있으나,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 한명회, 김수온 등도 태재의 대표적 문하생들로 꼽히고 있다.
태재의 제자 중 이보흠은 대구군수를 지낸 후 세조 즉위 후에는 순흥 군수로 옮겼다가 금성대군 단종 복위 모의 연루 혐의를 받아 처형됐다. 그러나 한명회(1415∼87)는 오히려 사육신 참살에 앞장서기까지 했고, 김수온(1409∼81)은 세조 때 승승장구했으며, 서거정(1420∼88) 역시 세조 밑에서 많이 활약했다. 서거정은 그 후까지 45년여 벼슬살이하면서 대사헌 대제학 6조판서 등 안 거친 벼슬이 없을 정도. 그러면서 문장으로 특히 유명하다. 세상을 냉시하던 생육신 김시습도, 15살 위이던 그와는 교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이러한 관학파에 의해 주도되던 학문적 흐름은, 팔공산권에서도 조선 중기에 이르면 대부분 사림파 주도의 것으로 치환돼 나갔던 듯 하다. 퇴계 이황의 문하생들 가르침이 이곳까지 확산된 것. 많은 영향을 남긴 이는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였던 듯 했다. 지역의 적잖은 젊은이들이 멀리 성주의 한강 자택까지 왕래하며 공부했던 것. 그러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들은 팔공산 창의의 주역들로 참가했다. 숫자상 퇴계의 문하생에 못잖다는 한강의 제자들은 '한강학파'로 분류되기도 한다.
퇴계의 또 다른 문하생 이숙량(李叔樑, 1519∼1592)은 아예 팔공산 자락으로 옮겨 와 서당을 짓고 제자를 길렀던 경우였다. 농암 이현보의 다섯째 아들로 안동 예안 출신. 대구 무태동 들연경 마을에서 지묘동 서원연경 마을 가는 길목 동화천변에 우뚝 솟아 있는 '화암'(畵巖) 근처가 서당 터라고 했다. 서당은 1563년 대구 최초의 서원으로 승격됐다. 국내 최초의 서원보다 불과 20여년 뒤지는 시기. 대구 권역에 있던 5개 사액서원 중 하나이기도 했다. 대구부사가 후원해 건물을 새로 지어 퇴계 이황을 주향, 한강 정구 및 우복 정경세를 배향으로 모셨다는 것이다.
서원을 남겨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던 이숙량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4살의 나이로 몸소 창의해 임진년 10월 진주대첩에 참가했다가 순국했다고 '임진왜란기 영남의병 연구'(최효식)는 적어두고 있다. 그리고 연경서원도 전국 650개 서원 중 47개만 남길 때 함께 철폐됐다. '화암'(畵巖)만이 남아 세월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을 뿐.
하지만 그 화암도 이미 옛 모습을 많이 잃었다고 했다. 본래는 지금보다 훨씬 컸으나 동화천변에 길을 낼 때 폭파로 잘라 내 작아졌다는 것. 주변 모습도 변했음에 틀림없어 보였다. 옛날엔 동화천 제방이 없어서 주위가 모두 하얀 모래로 뒤덮인 '갱빈'(강변)이었고 그래서 경관이 더 좋았다는 얘기가 들렸다. 그런 풍경은 불과 몇십년 전까지도 지속돼, 서변동의 성북초등학교로 통학하던 서원연경 아동들은 개울 바닥을 길 삼다가 비로 물이 불면 화암 뒤의 산을 넘어 다녔었다고 했다. 학교 사정이 좋잖던 시절, 서원연경 마을이 속한 지묘동 아동들이 백안동 공산초교, 서변동 성북초교, 파계사 밑 서촌초교 등 3개 학교로 나뉘어 취학하느라 그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였다.
글 박종봉 논설위원 사진 정재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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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가 보편화되고 웰빙 바람이 분 뒤 팔공산을 찾는 사람이 급격히 늘었습니다. 그 봉우리와 재, 골의 이름이 지금 같이 방황하도록 더 이상 내버려둬서는 후유증이 심각할 것입니다. 함께 지식과 지혜를 모으면 어떻겠습니까. 각자가 들은 이름과 사연들을 한데 모아 봉우리와 재들이 제 이름을 찾도록 해 주면 어떻겠습니까.
매일신문 '팔공산하' 제작팀이 지혜 모을 멍석을 일단 펴겠습니다. 인터넷 홈페이지가 그것입니다. www.imaeil.com으로 들어오시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팔공산으로 들어갈 배너를 달아 놓겠습니다. 우리 자신의 혼과 팔공산을 자부심으로 가꿀 뜻을 가진 모든 분들이 함께 지혜 모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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