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봉에서 하산하여
대장도 대장교 (장자도와 연결)를 건너서
장자교 구)다리를 걸어서 선유도에 갑니다.
장자도(앞) - 대장도(뒤) 연결 대리 (인도 차도 구분 되어 있네)
장자도-선유도 연결 구)다리. 현재는 보행자 전용 (위. 아래)
장자도 구)다리에서 바라본 대장도의 대장봉 (위) 장자대교 (아래)
"초 분"
명사 민속 서남 해안이나 섬에서 송장을 풀이나 짚으로 덮어 두는
장례 방법. 3년 내지 10년 동안 그대로 두었다가, 살이 다 썩은 뒤에
뼈를 골라 시루에 쪄서 땅에 묻는다.
선유도 - 무녀도 연결하는 선유교 앞 주차장
선유교에서 바라본 선유도 망실봉 맟 갯벌 (위. 아래)
선유도 유람선 선착장
선유교 및 우측에는 구)선유교
고운 최치원
고군산 군도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섬으로 신라초기에 본 신시도 주변에 풍성한 청어를
잡기 위하여 김해김씨가 처음으로 입주하여 사람이 살기 시작 하였다.
신시도는 신라시대의 대학자로 명성을 떨친 최치원선생이 일시나마 살았던 곳으로 더욱 유명하다.
선생이 신시도를 찾게 된 연유는 옥구군 옥구면에서 한동안 서원을 차렸을 때 해변가인
하제에서 서해를 바라보다 신시도의 우뚝 솟아있는 월영봉을 쳐다보고 곧바로 명산이라
고 칭찬을 하면서 뗏목같은 풍선(風船)을 타고 신시도에 도착 월영봉에 올랐다는 것이다.
최치원선생의 자는 고운 또는 해운이라고 부른다. 월영봉에 오른 고운은 그곳을 월영대라 칭하고 돌담을 쳐 거처를 만들어 놓고 때로는 생식을 하며 글을 읽었다고 한다.
해발 199m 인 월영봉은 선유8경의 하나로 가을이면 형형색색으로 물들인 단풍은 장관을 이룬다. 주민들은 너나없이 한폭의 동양화를 대표한다고 한다.
신시도 주민들이 이 월영대를 찾아 글을 읽은 최치원선생의 자가 고운이었음에도 해운이라는 자하나를 지어 부르게하여 신시도를 영원히 연상케 했다고 한다. 최치원 선생의 글 읽는 소리가 중국 남경까지 들렸다고 하는 얘기가 전해올 만큼 큰 소리로 글을 읽기도 하였지만 주변의 공기가 맑고 깨끗한 자연속에서 고독과 외로움을 잊어버리고 자연을 벗삼아 생활하였음을 의미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때는 신시도 마을 청년들이 고운의 뜻을 기리고 지키기 위하여 고운이 글 읽었던 곳에 흔적이 남아 있는 돌담을 손질 보존하고 있을 정도로 고운이 이섬에 살았던 것을 마을사람들은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군산시청 홈페이지)
선유교 옆 선유1리 앞 교차로. 마을 입구 진입로
선유1리 섬 둘레길 시작 지점
선유1리 몽돌 해수욕장 (흰 돌) 위.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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