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우리가족 첫 여행 나들이 (당진 외목마을. 솔뫼성지. 해미읍성)

대가야고령 2014. 11. 23. 18:34

왜목 마을에서

7월 7일 칠석에 견우직녀가 만나는 오작교 등

여행후 사랑하는 아들과 헤여진후

 

솔뫼성지 방문 후 서산시 해미읍성 여행.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님의 탄생지 솔뫼 성지

 

 

 

 

 

  

 

 


 

충청도 내포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솔뫼는 ‘소나무로 이루어진 산’, 곧 송산(松山)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내포를 ‘충청도에서 제일 좋은 땅’이라 하였다.

‘내포’는 바닷물이 육지 깊숙이까지 들어와 포구를 이루어 배들이 드나들며 새로운

문물을 전해주는 장소이다.

내포를 비롯하여 서해안 여러 지역에는 1784년 이승훈 세례 이전부터 중국으로부터 건네지는

서학 내지 천주교 문화와 신앙을 접하고 있었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확산되었던 실학사상의 분파인 서학이 내포 선비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내포의 서학자들은 서울의 실학자들과 교류를 하면서 내포의 양반, 중인, 서민 등 모든 계층에서

천주교로 발전하였다.

김대건 신부님의 10대 선조인 김희현이 아산 현감을 역임하면서 가문이 내포와 인연을 갖게 되었다.

9대 선조인 김의직이 충청병마절도사를 지내며 임진왜란에서 전훈을 세우자 가문이 대대로 토지와 벼슬을 보유하게 되었다.

사헌부감찰과 통훈대부를 지낸 8대 선조인 김수완 때부터 가문은 솔뫼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1784년경 김대건 신부님의 백조부 김종현과 조부 김택현이 내포 사도 이존창의 권유로 서울 김범우의

집에서 교리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자 가장인 증조부 김진후(비오)도 입교하여 가문이 천주교 신앙으로 귀의, 솔뫼를 ‘내포 신앙의 못자리’로 만들었다.

김 신부님 가문은 천주교 신앙에 귀의한 후 잦은 박해로 가족들이 여러 차례 투옥되고 고문을 받다가

순교까지 하여 솔뫼를 ‘순교자의 고향’으로 만들었다.

1906년부터 합덕본당 주임 크렘프 신부님은 솔뫼를 성역화하기 위하여 인근의 토지매입을 시작하였고,

1945년에는 백 빌리버 신부님이 솔뫼에 김대건 신부 복자비(福者碑)를 설립하였다.

1973년부터 솔뫼 성역화 사업을 계획적으로 시작하여 1982년에 대전교구는 순교자 신앙을 가르치고 전하는 ‘솔뫼 피정의 집’을 건립하여 솔뫼성지를 ‘순교자 신앙의 학교’로 삼았고,

국가와 지자체의 도움으로 2004년에는 김대건 신부님 생가를 복원, 2005년에는 김대건 신부님 기념관을 건립하여  이제 솔뫼성지는 ‘순교자 신앙과 문화의 전당’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해미읍성은 충남 서산시 해미면 남문2로 143. 성곽길이 1800미터. 높이 5미터

해미는 1414년(태종 14)에 충청도 덕산(德山)으로부터 충청도병마절도사영(忠淸道兵馬節度使營)이 옮겨온 곳으로,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전한 1651년(효종 2)까지 군사적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

 

해미읍성은 1491년(성종 22)에 축조되어 서해안 방어를 맡았던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성의 둘레가 3,172척, 높이가 15척, 성 안에는 3개의 유물과 군창이 설치되어 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 의하면 성의 둘레가 6,630척으로 보(步)로 계산하면 2,219보가 되고 높이는 13척, 치성(雉城)은 382첩으로 되어 있으며, 사방에 문이 있다고 했다. 이 기록을 통하여 볼 때 해미읍성의 규모가 훨씬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60년에 이 성을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읍성의 표본으로 삼아 사적으로 지정하고 보수공사를 하는 한편, 성 안팎에 무질서하게 자리잡은 민가를 철거·이전시키고 종합적인 보존계획을 세웠다. 1974년에 동문·서문이 복원되었으며 1981년에는 성 안의 일부를 발굴한 결과 관아 터가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