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추억

유의태 약수터와 구형왕릉 (가야)

대가야고령 2011. 10. 19. 20:13

명의 유의태 선생의 약수터를 찿아간다

폭우가 너무 많아와서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숲속 꼬불꼬불한 산길을 찿아서.....

 

한참을 산속 숲속을 가는데 길이 없어서 마음이 우쭐하다

잠시후 유의태 약수터 안내판이 있다

비를 흠뻑 맞으면서 산속길을 걸러서 25분

 

우산을 들고 비를 맞으면서 이거 장난이 아니다

찿아간  약수터 명성에 맞게 잘 보존되어 있다

 

시원한 물을 먹고 내려오는데

속이 편안하다

 

산을 내려오면 바로 앞에 구형 왕릉이 있다

규모가 대단하다 (큰 돌무덤)

비를 맞으면서 이곳 저곳을 둘러본다

 

가야와 관련이 있다는 말에

고령은 왜 이런것이 없나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구형왕릉.

마야계곡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구형왕릉.
한반도 유일의 피라미드형 7단으로 쌓인 적석총

우리나라에도 피라미드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웁다
.

'
마야 또는 잉카의 피라미드보다 작지만
.'
이끼나 풀이 자라지 않고 새도 날지 않는 돌무더기
.
낙엽도 떨어지지 않는 곳이라 알려져왔던 신비한 곳
.
단지, 영험한 기운이 감도는 곳으로만 알려져왔던 곳
.

근래에 밝혀진 '가락국 마지막 왕의 무덤
'.

'
왕이시여… 병사들 추모의 눈물이 돌마다 어린듯
.'
가락국 마지막 왕이 백제와 싸우다 전사했다는 구전
.
병사 한명이 돌 하나씩을 쌓아 이뤄졌다는 구형왕릉
.

애끓는 가야사 한이 담긴듯한 돌무덤
.
지금은 사라진 가야 역사의 장엄한 침묵
.
그 역사의 숨결이 저절로 느껴지는 구형왕릉
.

'
구형왕 그는 어떠한 인물이었을까
?'

......................
구형왕
..........................
금관가야의 마지막 제 10대 왕(521~532재위)이다
.
구충왕(仇衝王) 또는 구해왕(仇亥王)이라고도 한다
.
아버지는 겸지왕, 어머니는 각간 '출충'의 딸 숙(
).

'
통일신라 주역. 김유신 장군의 증조부
.'

532
(법흥왕 19) 왕비 및 세 아들(노종 무덕 무력)과 함께

신라에 항복해 상등 벼슬과 가락국을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

금관가야는 멸망했으나 진골귀족으로 신라에 편입되어

신김씨(新金氏)라 칭하며 왕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
아들 무력은 백제 성왕과 좌평 4명을 죽인 관산성 전투 주역
.

무력은 신라에서 많은 무공을 세워 각간 벼슬
.

신라 진흥왕 23(562)에 나라를 받친 구형왕
.
나라를 신라에 받쳤다는 뜻에서 양왕이라고 한다
.

신라에서 상등 벼슬을 받아 여생을 보냈다고 하는 설
.
동생 구해(仇亥)에게 양위하고 왜국 왕이 되었다는 설
.
(
일본 메이지 대학 鈴 木武樹 교수가 주장하는 학설
)

일본 천황도 황실 조상이 김해 김씨라고 말한 바 있다
.
김해 김씨와 일본 천황 황실과는 깊은 관련이 있는 듯
.
앞으로 누구인가 좀 더 역사를 연구할 필요가 있는 분야
.
................................................................

백두대간 양대 거봉인 백두산은 단군 할아버지의 양산(陽山
)
지리산은 삼신 할미 음산(陰山)이라 산청 옛지명은 산음(山陰
)
산청은 '산 높고 물 맑은..' 산고수청(山高水淸)이란 뜻의 지명
.

구형왕릉이 있는 왕산은 천왕봉 동쪽 능선 가운데 위치
.

엄천강이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 김수로왕 별궁터

가락국 태조인 김수로왕이 지었다고 하여.. 태왕궁

태왕산이라 하였다가 지금은 왕릉이 있다 하여.. 왕산


하봉-쑥밭재-왕등재-밤머리재-응석봉 능선 가운데 왕등재

왕등재 부근에서 다시 지능선을 탄 지리산 동쪽 끝 봉우리
.
이곳 왕산 산자락에 구형왕릉은 국내 유일의 돌로 된 왕릉


'
피라미트 형식일까
?
아니면, 탑 형식일까
?'

그 옛날 가야는 낙동강 하류에서 중류에 걸쳐

금관가야니 아라가야니 이런저런 가야 연맹체
.
가야 연맹 간 결속력이 오늘날 경상도 결속력
.

"
우리가 남이가
."
"
보리 문동이 제
"

물이끼 머금은 돌 하나마다 체온같이 다가오는 온기
.
햇볕에 달궈진 따듯함 하나마다 천년세월을 품은 듯
.
왕릉 입구 화계마을에는 왕산 약국 식당 슈퍼도 있다
.

'
자랑스러운 가야인 후손이라는 자부심
.'

벽송사 초입 추성 삼거리의 추성은 구형왕이 쌓은 성

왕릉은 비교적 큼직한 돌로 길쭉하고 편평하게 첫째단

위로 좁혀가며 일곱째 단이 맨위 봉분을 떠받드는 형상
.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의 왕실 무덤으로도 알려졌다
.
측면이 사다리꼴을 이루어 꼭대기가 평평한 것도 있다
.

이집트, 수단, 에티오피아, 서아시아, 그리스, 키프로스.·

이탈리아, 인도, 타이, 멕시코, 남미 피라미드 등이 유명
.

피라미드의 전성시대는 BC 2686 ~ 2345년 경
.

사카라 남쪽 다슈르 장사방형(長斜方形) 피라미드

엄격한 4각뿔 무덤으로 발전하는 단계를 나타낸다

이집트에서 가장 큰 기자에 있는 파라오 피라미드


멕시코 테오티우아칸 태양 피라미드와 달 피라미드
,
치첸이트사 카스티요, 안데스 산맥의 잉카문명 유적

아메리카 피라미드는 흙 표면에 계단식 돌을 입힌 것
.

......................................................................
......................................................................
'
모두 몽골리안 종족들의 왕실 무덤이란 공통점
.'
........................................................................
.........................................................................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가락국 제10대 구형왕 돌무덤
.
사적 제 214 호로 지정되어 있다
,

층단(層段)을 이루는 방형(方形)으로 경사면에 축조한 것
.
전면은 7단 이고, 후면으로 갈수록 층의 높이에 따라 체감
.
무덤 경사면을 따라 7단으로 쌓아올린 형태가 참 특이하다
.

꼭대기는 타원형으로 쌓았고 전면 중앙의 전체 높이는 7.15m이며
,
4단 동면에 너비 40cm 내외, 높이 40cm 내외, 깊이 68cm의 구멍
.
이 돌무덤을 중심으로 같은 잡석으로 높이 1m 내외의 담이 쌓여있다
.

'
구형왕릉에 구멍을 뚫어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

그것은 감실이라고 부르며 구형왕의 영혼이 머무는 곳
.
그 영혼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석실
.
고대 가야인들의 죽음에 대한 의식구조를 짐작할 수 있다
.

감실은 신주나 불상 또는 등잔을 안치해 두는 곳

살아남은 자가 죽은 사람을 위해 만든 눈과 통로
.
영혼이나마 자유롭게 세상과 교통하라는 혼의 통로
.

전면 중앙에 가락국호왕릉(駕洛國護王陵)이라고 새긴 석비가 있다
.
그 앞에 상돌과 장명등, 좌우에 문인석·무인석·돌짐승 l쌍씩 배치
.
이 석물들은 요즈음의 작품으로 원래 돌무덤과 시대적 차이가 많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에서 왕릉임이 밝혀졌고
,
이 산 아래에 왕산사에서 옮겨왔다는 구형왕과 왕비의 초상화가 봉안
.

구형왕릉은 지금부터 약200년 전에 다시 찾게 되었다
.
왕산사 절에 보관된 구형왕과 계화왕비의 영정과 유물

그리고, 탄영(坦瑛)의 왕산사기(王山寺記) 등에서 고증


생초면 어서리 태봉산 남향 구릉 위에 50 기의 고분 흔적
.
개간, 도굴로 파헤쳐져서 지금은 10 여기 형태만 남아있다
.
석실입구 통로가 있는 횡구식 석실분으로 5세기 지배층 무덤


고분군 바로 아래 강기슭 절벽 위에는 어외산성(일명 척동산성
)
150 개 무덤 흔적이 남아 있고 성내에 동서 13m, 남북 12m 연못

7
세기 경 신라와 백제 국경지대에 위치한 구형왕릉과 멀지 않은 산성


'
아직 역사속에서 밝혀지지 않은 5세기 경 유적지
.' 

고구려, 백제, 신라의 중앙집권적 3국 시대에 가락국
.
김해지역에 자리잡은 가락국은 6 가야 연맹 중 최대국
.
1
세기 무렵 일본의 야마타이(耶馬台) 왕국을 다스렸다
.

한편 가야연맹은 신라와 영역 다툼에서 번번이 패배

백제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신라를 견제하였는데
,
4
5세기 초엔 중국 남조에 사신을 보낼 만큼 국력 신장
.

6
세기 초 고구려로부터 세력이 밀린 백제와 신라가 서로 동맹

가야 연맹을 넘보자 우호관계에 있던 백제와 사이가 벌어지며

신라의 무력과 회유에 말려들어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

게다가 가야의 분국이었던 일본의 야마타이 왕국이 없어지고

친백제 야마토(大和) 정권이 들어서자 가야는 중계 무역권 상실
.
백제 신라 일본이 직접 무역에 나서자 경제적 기반도 차츰 약화
.

고구려 ·백제· 신라의 틈새에서 가야는 490년 역사를 마감한다
.
철기와 비옥한 농경지를 토대로 선진 철기문화를 일궈낸 가락국
.
신라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일본의 통일국가 수립에 공헌했고

한때 눈부신 발전을 했지만, 삼국과의 경쟁에서 밀려 역사의 뒤안길
.

구형왕은 밀양의 이궁대에서 신라 법흥왕에게 선양 절차를 마친 뒤

낙동강을 지나 이곳 왕산 태왕궁으로 들어와 은거하다 5년 후 운명
.

훗날 그의 후손 김유신이 신라에서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
구형왕 부친은 '분질수이질'이며 왕후는 '계화' 아들은 '무력장군
'
신라가 삼국통일 위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기여한 바가 매우 컸다
.

무력장군의 아들 서현은 경주의 길목을 지키는 양주 도독
.
지금의 양산 동래를 다스렸고 그 부인은 진흥왕의 조카 '만명
'.
'
서현' '만명'이 삼국 통일의 주역 김유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

구형왕의 증손자 김유신은 화랑도 시절 구형왕릉을 지키며

지리산 일원에서 호연지기를 사귀어 훗날 삼국통일의 주역


화계리 덕양면에서 1km남짓 위에 위치한 구형왕릉은 석적릉

기존의 봉토무덤과는 다른 돌무덤의 형상으로 피라미드 같다
.
언덕 중턱에 계단식으로 축조된 점이 평지의 피라미드와 차이
.

층단은 모두 7, 총 높이 7.15m이며, 방형이지만 앞면은 곡선

모퉁이도 뚜렷하지 않으며, 꼭대기는 봉분같이 타원형 반구형
.

무덤 앞쪽엔 '가락국 양왕릉'이라고 새긴 비석과 상석
,
장명등, 문인석, 무인석, 석수가 각각 1쌍 씩 놓여 있다
.
능 왼편에 보이는 '護陵閣'은 왕릉을 보호하는 전각이다
.

'
최근에 만들어진 것들이라 역사적 가치는 없는듯
.'

돌담 소로 따라 올라 제일 위쪽 단은 높이 7.15 M 둥근 봉분

주변 숲과 거대한 돌무더기가 어우러진 독특한 계단식 적석총

1,500
년 전 가야국의 유적지는 일반 왕릉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

구형왕릉은 1798년 민경원이 왕산사기를 찾아내며 확인
.
김유신이 화랑시절 이곳에서 시릉살이를 하며 무예 연마

돌무덤 1m 아래 길가에 김유신장군이 활을 쏘던 사대비


현재 가락국의 신비를 간직한 유적은 구형왕릉 바로 아래 덕양전

가락국 시조왕 유허비, 수정궁, 왕대가 지리산 기슭에 흩어져 있다
.
덕양전은 구형왕과 왕후의 영정을 모시고 매달 향례를 드리는 장소
.
......................................................................................
<
산청읍에서 군내 버스로 왕릉입구에서 하차

덕양전 왼편 차로를 따라 10분정도 올라가면

넓은 주차장과 국내 유일한 돌로된 구형왕릉
.

내려올 때에는 남쪽 향양리 구사촌 마을 가파른 흙길

향양리에서 산청읍까지는 도보로 약 40분 소요거리이며
,
콜택시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관광버스도 진입 가능하다
.

군내 버스는 산청 -향양 리-수철리 버스를 이용
.

88
고속도로와 대진고속도로를 지나 <생초IC>로 내려와서

나들목을 나서자마자 좌회전후 15분 가면 구형왕릉 안내판

마을 입구 덕양전(德讓殿)에서 2km 더 들어가면 <구형왕릉
>.

왕릉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올라가면 <유의태 약수터> 안내문

유의태는 산청 출신 명의로 동의보감을 펴낸 허준의 스승이다.
이곳은 한약 제조에 사용되었던 약수터라고 알려져 명성이 높다
.

<
구형왕릉>은 김수로왕의 직계후손이자 10대 마지막 왕의 능
.
6
가야 가운데 가장 먼저 세력을 구축한 나라가 금관 가야이며
,
김수로왕 이후 491년 간 이어오다가 532년 신라에게 평화 합병

신라 법흥왕 19(532)에 구형왕이 이곳에 묻혔고 시호를 양왕
.

신라에게 가락국을 넘겨주고 양왕 예우를 받은 구형왕
.

전쟁에 시달리던 가락국 백성들 고통을 덜어주려 신라와 합병
.
'
왕산의 김수로왕 별궁'인 수정궁으로 옮겨 산지 5년 만에 운명
.
구형왕릉은 자연석을 피라밋 식으로 쌓아 올렸고 봉분은 둥근 형태
.

석총의 독특한 모습은 한반도 다른 왕조 왕릉과는 전혀 다르다
.
고인돌도 아니고.. 돌무더기도 아닌..한반도에서는희귀한 돌무덤
.
일부 학자들은 탑이라고 하지만 180 년 전 왕산사기에 기록된 왕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