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가 (유명인사)

[스크랩] 솥바위(鼎巖)의 전설을 찾아서[학풍회(鶴風會) 2009년 3월 간산기(看山記)]

대가야고령 2011. 2. 17. 13:01

정암(鼎巖: 일명, 솥바위)

 

함양의 남덕유산 남쪽 계곡에서 발원한 남강(南江)은 진주를 지나 동북동으로 곡류(曲流)하며 의령, 함안의 넓은 들을 적시고 창녕의 남지읍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이 남강의 물줄기가 진주시 지수면을 지나 의령과 함안 사이를 통과하면서 그 강 가장자리에 기이한 모양의 바위 하나를 솟구쳐 놓았다. 이 바위는 반쯤 물위에 드러나 있으며 물 아래에 솥의 다리처럼 세 개의 발이 받치고 있다 한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이 바위를 정암(鼎巖) 또는 솥바위라고 한단다.

 

남강(南江)


과거 동양에서는 발이 달려 있지 않은 솥을 부(釜)라 하고 세발이 달린 솥을 정(鼎)이라 하여 구별했다고 하는데, 세발솥은 중국 고대국가에서 왕권의 권위를 상징했다 한다. 한편, 조선말의 한 도인이 이 솥바위에 앉아 머지않아 이 바위를 중심으로 20리 이내에 국부(國富) 3명이 난다고 예언을 했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공교롭게도 재벌 창업주 3명이 이 바위 인근에서 태어났다.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의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의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그리고 함안군 군북면 신창리의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가 곧 그들이다. 세 그룹 모두 그 이름에 별이 들어간다는 점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3월도 중순으로 접어들며 곳곳에 매화가 다투어 피어나기 시작한다. 그 연분홍빛 꽃잎과 그윽한 암향(暗香)이 봄을 예감케 하지만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한 세계적인 경기불황의 여파 때문인지 봄이 봄 같지가 않다. 그래서일까. 학풍회의 2009년 3월 간산지는 이 정암(鼎巖)을 중심으로 반경 20리 안에 산재해 있는 세 재벌가 창업주의 생가로 정해졌다. 아마도 이 살벌한 경제위기의 한파 속에서 세 재벌가의 부의 비밀을 풍수적으로 풀어보고자 함이리다.

 

이병철 생가 대문

 

이병철 생가 사랑채

 

이병철 생가 안채

 

이병철 생가 광(壙)

 

이병철이 분가하여 살던 집(지금은 별장으로 쓰고 있다고 한다)


2대의 차에 나눠 탄 학풍회 13인이 첫 번째로 도착한 곳은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 위치한 호암 이병철의 생가였다. 호암(湖巖) 생가는 1851(辛亥)년 이병철의의 조부가 전통 한옥 양식으로 지었는데 호암은 유년 시절과 결혼하여 분가하기 전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생가는 대문채 사랑채 안채 광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좌우에 있는 집들은 호암의 조부의 두 동생들 집이었다고 한다. 한편, 생가로 들어가는 마을입구에도 커다란 한옥이 한 채 있는데 이곳은 호암이 결혼 후 분가해서 살던 집이라고 한다. 모두가 고래등같은 기와집이다.

 

이병철 생가 돈(?) 바위


감여가(堪輿家)들에 의하면 이 집은 곡식을 쌓아 놓은 것 같은 노적봉(露積峯)형상을 하고 있는 주변 산의 기가 산자락의 끝에 위치한 생가 터에 혈(穴)이 되어 맺혀 있어 그 지세가 융성할 뿐만 아니라 멀리 흐르는 남강이 물이 빨리 흘러가지 않고 생가를 돌아보며 천천히 흐르는 역수(逆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한다.

 

이병철 생가 우물(안채 앞과 사랑채 앞에 각각 1개씩 있다)

 

광안에 전시된 물품들

 

학풍회 회원들


그러나 초심자의 눈으로 보기에 좌청룡 우백호 조산 주산 안산 따위의 풍수적인 형국에 들어맞는 구석은 하나도 없어보였다. 다만 사랑채와 안채 앞에 각각 하나씩의 우물이 있다는 것과 안채 오른쪽에 돈다발 또는 금괴를 차곡차곡 쌓아올린 듯한 바위가 있다는 점이 조금 특이할 뿐이었다. 사람들은 그 돈다발을 쌓아놓은 듯한 바위 때문에 이집의 재물운이 발복하였다는 해석을 내리고 있으나 풍수에서는 집안에 바위가 있는 것을 좋지 않게 본다는 점에서 좀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야시대 고분군

 

솥바위(이곳을 중심으로 반경 20리 이내에 세 재벌의 창업주 생가가 흩어져 있다)


호암 생가를 나와 20번 국도를 타고가다 길 왼쪽의 가야시대 고분군을 잠시 살펴보고 정암(鼎巖) 바위로 갔다. 남강을 가로지른 다리위에서 내려다보니 과연 물속에서 솟구쳐 오른 바위가 솥뚜껑을 닮았다. 물에 잠긴 아랫부분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가늠하기 어려우나 여름날 이곳에서 물놀이하기에는 안성맞춤이 아닐까 싶다. 이곳이 고향인 사람들에게는 그 유년의 빛바랜 추억 중에 이 바위를 무대로 한 여름날의 물놀이 장면이 남아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항용 그런 식으로 이름난 유물이나 유적과 친화(親和)하며 또 그 유물이나 유적들은 그런 추억의 배경으로서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법이다. 그러니 박물관의 까맣게 손때 묻은 불상의 코를 보며 마냥 혀를 찰 일은 아니다. 

 

조홍제 생가 대문

 

조홍제 생가 사랑채

 

조홍제 생가 안채

 

조홍제 생가 광

 

조홍제 생가 화장실


정암바위를 뒤로 하고 찾아간 곳은 함안군 군북면 신창리에 있는 효성그룹의 창업주 조홍제의 생가였다. 넓게 둘러쳐진 돌담 안에 앉아있는 커다란 기와집을 기웃거리고 있자니 관리인으로 보이는 나이든 할머니 한분이 보행기를 앞세우고 나타나 대문을 열어주었다. 마을 경로당에 놀러갔다가 사람들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신 모양이다. 조홍제 생가도 그 기본적인 구조는 이병철 생가와 거의 같았다. 대문채 사랑채 본채 광이 있고 우물이 있다. 화장실이 별채의 기와집으로 되어 있는 것이 좀 특이하긴 하다. 

 

백이산(白夷산: 주산 겸 안산)


이곳도 내가 알고 있는 풍수적인 상식으로는 들어맞는 것이 하나도 없다. 뒤로 멀리 남강이 흐르고 그로부터 집까지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을 뿐 제대로 된 구릉하나 보이지 않는다. 집 앞으로 잘 생긴 산봉우리 하나가 우뚝 서있을 뿐. 그래서일까 일부 감여가들은 이 터를 회룡고조(回龍顧祖)의 형국으로 보아 풍수적인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는 것 같다.


무곡 금성체 형상의 주산인  백이산(白夷山)에서 발맥한 용은 은룡(隱龍)으로 이 생가의 동네 앞 논두렁을 타고 입수하고 있다고 한다. 다만 원래 안산(案山)은 혈에서 바라볼 때 약간 낮으면서 푸근하게 맞아들이는 형상을 하여야 하고 험하거나 너무 높으면 안 되지만 회룡고조의 혈일 때는 안산이 높고 험해도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회룡고조의 혈은 안산이 곧 주산으로서 조상에 해당되는 주산은 손자나 자식을 귀여워하고 예뻐하기 때문에 괜찮다는 것이다.

 

백이산


결국 집 앞으로 보이는 높고 우뚝한 산이 백이산인데 그 백이산이 주산이자 안산으로서 이곳 효성 생가가 위치한 곳은 백이산에서 출발한 용맥이 긴 행룡을 마치고 하나의 열매에 해당되는 혈을 맺게 되는데 여기서 다시 자신이 온 곳 즉 백이산을 되돌아보는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견강부회(牽强附會)의 논리 같다. 

 

조씨 재실 대문

 

재실 안채

 

동재

 

서재


조홍제 생가에서 왼쪽으로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우람한 몇채의 기와 건물이 섰는데 조씨들 재실이라고 한다. 성립문(誠立門)이라는 현판이 걸린 대문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가니 정면에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현판이 붙은 본채와 그 좌우로 수덕재(修德齋)와 삼성재(三省齋) 건물이 나란히 서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집안 곳곳이 돈들인 흔적이 역력하고 본채 앞 잔디밭으로 봄볕이 따스하게 내려앉았다. 학풍회 지관 13명은 그 잔디밭에 주저앉아 점심을 먹었다. 각자가 싸온 도시락을 풀어헤치니 모두가 진수성찬이다. 거기다 옥조당 형님이 삼겹살까지 굽고 소주와 라면까지 곁들이니 몽롱한 춘흥(春興)이 절로 났다.

 

지수초등학교


점심식사를 마치고 포만한 배를 문지르며 남해고속도로를 얼마쯤 달리다 지수초등학교로 향했다. 지수초등학교는 겉으로 보기엔 그저 평범한 시골학교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나라 제일이며 세계적인 대기업의 총수를 그것도 3명씩이나 배출하였기에 한국 기업사의 산실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전국에 알려진 유명한 명문초등학교라고 한다. 연암 구인회, 호암 이병철, 만우 조홍제가 모두 이 학교 출신이라 한다.

 

소나무


1921년 김해 허씨 가문의 만석꾼이었던 허준 선생이 땅을 기증하여 설립했다고 하는데 위 세 사람 이외에도 구태회, 구자경, 허정구, 허신구 등등 삼성, 럭키, 효성그룹의 총수와 수뇌진이 모두 이 학교 출신이라 한다.

 


교사(校舍) 앞에는 지금도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데 원래는 세 그룹의 회장이 한 그루씩 심어 모두 3그루였던 것이 한 그루는 죽고 두 그루만 남아 있다고 한다.

 

상남관


학교 동편에는 조그만 시골 초등학교 치고는 꽤 큰 실내체육관이 세워져 있는데 이 학교 13회 졸업생이면서 해방 후 3년간 지수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구자경 LG 명예회장이 이 학교가 학생 수 부족으로 폐교될 위기에 처하자 모교에 긴급히 거금을 투입하여 체육관을 설립하고 인근지역의 학생들에게 특별 장학금을 주며 학생모집 활동을 폄으로서 간신히 학교를 살려 낸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체육관의 이름을 구자경의 호를 따서 상남관(上南館)이라고 붙였단다. 


초등학교 운동장을 둘러보다 모두들 동심(童心)이 살아났는지 기수별 릴레이 시합을 하자고 한다. 시합 중 은진당 형님과 청옥당이 나란히 달리게 되었는데 은진당 형님이 승부욕이 발동해서 청옥당을 밀어버리는 바람에 둘이 나란히 운동장을 굴렀다. 청옥당은 은진당에게 깔려서 꽤 아팠을 텐데도 모두의 즐거움을 위해 아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

 

승산리 마을(뒤로 구실봉이 보인다)


구인회의 생가는 지수초등학교 정문에서 걸어가도 될 만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勝山里)는 크게 상동마을과 하동마을이 있고 그 밖에 남해고속도로 넘어 임내마을, 허곡마을과 숲안마을, 허실마을 등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데 구인회의 생가는 이중에서 하동마을에 위치하고 있단다. 하동마을은 마을 전체가 고대광실(高臺廣室)의 기와집이 즐비하였고 어느 집이 구인회의 생가인지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만큼 이 동네에는 옛날부터 부자들이 많았다는 한 방증이리라. 

 

구실봉과 지신산


마을 뒤편으로 야트막하면서도 길쭉한 산줄기가 마을을 감싸고 있는데 구슬같이 둥글게 생겨 ‘구실(구슬의 방언)봉’이라 한단다. 그리고 구실봉 바로 옆으로 솟아오른 또 하나의 작은 봉우리를 지신산이라고 하는데 승산마을의 북쪽을 막고 있어 수구막이 역할과 함께 겨울의 차가운 계절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단다.

 

방어산(마치 새가 날개를 펴고 마을로 날아드는 듯한 형상이다)


한편, 승산리 마을에서 약간 왼쪽, 그러니까 동남쪽을 바라보면 한 마리 새가 날개를 활짝 펴고 마을을 향하고 있는 듯한 형국의 산이 우뚝 솟아 있는데 이 산이 마을의 진산(鎭山)인 방어산(防禦山, 해발 530.4m)이라고 한다. 결국 이 승산리 마을의 형국은 여러 개의 구슬이 뭉쳐있는 구실봉이 새집처럼 포근하게 마을을 감싸안고 있고 그 앞으로 커다란 새 한 마리가 날개를 펼쳐 마을을 향해 날아드는 모습으로 풍수상 비봉귀소형(飛鳳歸巢形)의 형국인 것이다.


이러한 풍수적인 설명을 곁들이지 않더라도 사방으로 산이 둘러싸고 있고 앞으로는 남강이 서에서 동으로 흘러가는 마을의 형국은 그곳에 들어선 사람으로 하여금 포근하고 따스한 느낌을 갖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거기다 인근에 넓고 기름진 들판이 연이어 이어져 있으니 그 경제적인 풍족함이야 더 말해 무엇 하리. 만석꾼이 셋, 천석꾼이 일곱, 승산 부자 열 명이 도합 3만 7천석을 했다는 말이 호사가들이 지어낸 빈말로만 들리지가 않았다.


결국 풍수적인 발복이론을 떠나 어느 곳이든 큰 강이 흐르고 있고 그 연안을 따라 넓고 기름진 들판이 펼쳐져 있다면 예로부터 큰 부자가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닐까. 더군다나 산업이 분화되지 못하고 모든 생산을 토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에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이렇게 따져 들어가면 명당에서 인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물이 나오는 곳이 곧 명당인 셈이고, 결국 풍수이론이라는 것은 기존의 지배권력을 정당화시켜주는 상징적인 이데올로기를 제공해 주거나 그 반대로 기존의 지배권력을 공격하여 무너뜨리려는 반대세력에게 새로운 정당성의 기반을 제공해 주는 도구는 아닐런지. 우리의 지난 역사에서 풍수가 수행해온 역할을 곰곰이 되돌아보면 더욱 그런 의구심이 든다.

 

구인회 생가


어렵게 찾아간 구인회의 생가는 굳게 잠겨있었다. 담장너머 집안을 들여다봐도 마을 전체의 인상이 워낙 강렬했던 탓인지 다른 집과 크게 달라 보이는 점은 없었다. 집 뒤로 대나무가 심어져 있는 것이 모종의 비보(裨補)적인 배려가 깔려있을 것이라는 짐작이 들뿐.

 

봉화산(좌청룡: 사진아랫부분에 철판으로 가려진 부분이 노무현 생가인 듯)


지수(智水)를 빠져 나와 다시 남해고속도로를 달렸다. 그리고 진영인터체인지에서 빠져나와 김해시 진영읍 봉하리에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가로 향했다. 마을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니 마을 동쪽으로 우람한 바위산이 강렬한 느낌으로 시선을 끌어당겼다. 봉화산(烽火山, 해발 140.4m)이었다. 봉하라는 마을은 봉화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우백호(대단히 빈약하여 서북풍이 곧바로 몰아친다)

 

봉하마을의 매화(추워서인 아직 피지 못하고 꽃망울만 맺혔다) 


노무현의 생가는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하면서 새로 지은 몇 채의 건물 바로 앞에 있었다고 하는데 최근 복원을 위해 헐고 공사 중이라 한다. 집 앞에 서서 좌우와 앞을 살펴보니 왼쪽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봉화산에 비해 오른쪽은 툭 터져있어 차가운 서북풍이 그대로 몰아치고 있었다. 마을 전체가 남향을 하고 있지만 포근한 느낌은 없고 으스스한 한기(寒氣)가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지금까지 돌아본 재벌가의 생가에는 모두 매화가 만발했는데 이곳만은 꽃 몽우리만 맺혔을 뿐 활짝 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안산(案山: 평평하게 고르지는 못하지만 분명한 일자문성형국이다)


그래도 집 앞으로 바라보이는 안산(案山)만은 볼만했다. 단정한 모습은 아니지만 쉽게 찾기 힘든 평평한 형국의 산이었다. 옥상 고문님이 노래처럼 되뇌던 제왕혈(帝王穴)은 반드시 안산이 토체(土體)형인 일자문성(一字文星)의 형국을 갖추고 있다는 말씀이 실감으로 다가왔다. 결국 좌청룡에 해당하는 강렬한 느낌의 봉화산과 이 일자문성의 안산이 노무현의 대통령으로서의 운명을 설명해주는 실마리가 아닐까 싶었다.

 

원동 매화밭

 

낙동강 위로 지는 낙조


봉하마을을 뒤로 하고 삼랑진을 거쳐 원동으로 향했다. 낙동강 기슭에 자리 잡은 매화밭에는 매화가 만발하였다. 꽃 대궐을 차린 듯 지금까지 둘러본 그 어떤 고대광실의 기와집보다 그윽하고 화려했다. 수 백리를 달려온 강물이 속도를 늦추며 몸을 풀고 그 위로 서산으로 기운 햇살의 여명(黎明)이 내려앉았다. 가슴속에서 슬픔인지 설렘인지 모를 애잔한 느낌이 술기운과 함께 피어올랐다.


2009년 3월 14일

못은 달을 비추는 거울 月池

출처 : 달못
글쓴이 : 월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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