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상남도 합천군에 들어서 합천호를 지나는 호반도로로 시원하게 통과해 요즈음 도로와 공원등 한창 공사 중인 봉산을 지나 봉산교를 건너 바로 우회전해 압곡리 에서 오도산 자연휴양림으로 들어서 오도산을 넘는 59번을 넘어야 하는데 먼저 성산이 작년에 가보니 아직 길이 만들어 지지 않아 넘을 수가 없다고 한다. 잠시 입구에서 물어보니 도로가 없다고 한다. 이제 59번 도로의 여행은 더 이상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싸리터 재를 넘어 묘산면을 지나 화양리에 이르렀을 때 커다란 네 개의 밤색 안내판을 만나게 된다.
화양 마을 입구에서 좁은 길로 약 10여분 올라가니 왼쪽에는 묵와고가가 자리하고 우측 끝에 차량을 주차한 곳에 위로 영사재(永思齋)가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은 옆 묵와고가를 지은 윤사성의 6대조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일제시대엔 독립청원서를 파리장서에 서명한 윤종수 선생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지금 파평윤씨의 세손인 윤창동 씨가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얼핏 보기에도 굉장한 넓이의 터에 자리잡은 마을같은 분위기의 공간에 지어진 건물들이 첫 느낌이다.
![]() [묘산면 화양마을 입구엔 커다란 4개의 밤색 안내판이...]
![]() [영사재의 모습이 반듯하게...]
![]() [영사재의 측면과 담장 그리고 높이 솟은 문이 고가의 풍치가...]
![]() [담장 위에도 기와를 얹어놓은 돌담장도 멋지고...]
![]() [교목당 뜰안에 잡풀이 무성한 것이 아쉬울뿐...]
![]() [교목당 처마끝을 보면 보기드문 기법으로...]
![]() [교목당(敎睦堂) 이라 쓰인 현판이 세월을 말해주는 듯...]
![]() [육우당(六友堂)이라는 현판도 걸려있고...]
![]() [기둥밑에 이렇게 멋진 돌기부분이 조각되어 있는데 무슨 의미일지...]
![]() [양헌(養軒)이라 쓰인 현판도...]
![]() [영사재의 교목당 앞에서 내려다 보면...]
![]() [영사재 뒤를 오르면 작은 쪽문으로 연결된 세덕사라는 사당이...]
![]() [영사재 뒤뜰엔 세덕사(世德祠)라 쓰인 사당이...]
![]() [묵와고가가 얼마나 큰지 담장끝이 안보일 정도로...]
![]() [陜川妙山默窩古家...]
![]() [묵와고가 솟을대문의 문지방이 특이하게 생겨...]
1984년 12월 24일 중요민속자료 제206호로 지정되었다. 윤두식이 소유하고 있다. 조선 선조 때 선전관(宣傳官)을 지내고 인조 때 영국원종(寧國原從) 일등공신으로 봉작된 윤사성(尹思晟)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창건시 집터가 600평이 넘고 한때는 8채나 되는 집이 들어찼다고 전해진다. 경내에는 안채를 비롯하여 사랑채·사당·대문채 등이 있다. 대문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집으로 중앙칸은 솟을대문이고, 우측 2칸은 헛간, 좌측 2칸은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 안쪽 왼쪽에 있는 4칸의 사랑채는 ‘ㄱ’자형으로 마당보다 훨씬 높은 대 위에 지었다. 누각 형태의 마루가 앞쪽으로 돌출되었으며, 마루의 남·동벽은 판벽이고 서벽은 개방되었다. 전체적으로는 맞배지붕이나 마루의 앞부분만은 합각을 세우고 팔작지붕으로 하였다. 홑처마에 기와를 이었으며 ‘묵와고가(默窩古家)’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사랑채 오른쪽 가까이에 곳간채가 있다.
사랑채 동쪽으로 중행랑채가 이어지며, 중문을 지나 내정(內庭)에 들어서면 행랑채보다 1단 높은 댓돌 위에 안채가 있다. 안채는 ‘ㄱ’자형으로 정면 7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집이며, 방 2칸과 부엌을 전면으로 배치하고 돌출된 부분에는 방과 대청을 배치했다. 건넌방은 다른 부분보다 주간(柱間)이 넓고 앞벽에 커다란 넉살무늬창을 설치하였다. 기단은 2중기단으로 1층기단 위에는 화단을 조성했다. 안마당 오른쪽에는 창고가 있으며, 안채 왼쪽 뒤로 몇 단 높은 곳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집인 사당이 있다. 사당은 안채에서 협문(夾門)을 통하여 출입할 수 있으며, 외부와는 별도로 내부 담장이 설치되어 있다. 그밖에 윤사성의 6대조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건립한 영사재가 있다. 파리장서에 서명운동한 항일독립운동가 윤중수(윤사성의 10 대손)가 살았던 유서 깊은 고택인데, 우리가 이렇게 와서 정서와 느낌을 다했으면 좋왔을 터인데 문이 잠겨 겉핥기만....
![]() [안채의 앞은 볼 수가 없었지만 뒤쪽만 보아도 운치가...]
![]() [묵와고가 옆에 복원중인 건물들도 뒤로도 많이 보이고...]
![]() [묵와고가를 영사재쪽에서 보면...]
화양리 입구에서 조금 오르다 좌측으로 표시된 안내판에 의해 묘산 묵와고가와 영사재를 둘러본 후 다시 입구 쪽 삼거리로 내려선다.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가면 바로 화양리 야천 신도비가 언덕 위에 반 듯하게 서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언덕은 차량이 다니는 길인데 좌우로 세워놓을 공간이 확보되질 않아 고개를 넘어 선후 임도처럼 만들어져 있는 길옆 공간에 차량을 주차하여 놓고 바로 올라와 야천 신도비 앞에 선다. 좀 일그러진 마음을 갖게 되는 건 전신주가 먼저건 신도비가 먼저건 간에 이런 모습을 하게 한 공사 관계자들의 정서가 의심 스럽다.
![]() [전신주와 함께 잘 어울리는 야천신도비...]
![]() [화양리 야천신도비 안내문...]
![]() [반남박씨 문중이 보호를 위해 세웠다는 비각...]
![]() [비신에 새겨진 금석문이 잘 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한번 시도를...]
야천(冶川)朴紹의 神道碑銘 탑본첩. 비명의 撰者는 朴淳이다. 篆額는 金應南이 썼고, 본문은 韓濩(石峯)의 글씨이다. 1590년은 竪碣한 연도이다. 士林의 名賢이라는 박소의 명성에 걸맞게 撰者와 書者가 당대 최고의 명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朴淳(1523-1589)은 명조·선조조의 명신으로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김응남 역시 좌의정을 지낸 명사였다. 김응남은 南應雲·金尙容과 함께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篆書의 대가로 많은 비갈 글씨를 많이 남겼다. 특히 조광조의 신도비명은 盧守愼(撰), 李山海(書)와 만들어 낸 역작이다. 참고로 이산해는 김응남의 처남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필첩에는 김응남의 篆額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한편 이 탑본첩은 한호의 서예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주지하다시피 한호는 徐敬德·朴淳 등 당대 명사즐의 비갈 글씨를 많이 썼다. 이것은 임진왜란 이전에 쓴 것으로 여러 비갈 글씨 중에서도 역작으로 꼽히고 있다.
신도비의 주인공인 朴紹(1493-1534)의 字는 彦?, 號는 冶川, 諡號는 文康이다. 반남박씨의 중흥조로서 趙光祖·朴英·金安國·李彦迪 등 사림파의 명사들과 교유가 깊었다. 그는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외가인 합천에서 성장했는데, 아호인 冶川도 冶爐縣의 지명에서 유래한다. 조광조 등 이른바 기묘사림들에게 학행이 알려져 1519년(중중 14)에는 현량과에 천거되기도 했으며, 동년 식년 문과에 장원하여 문명을 크게 떨쳤다. 이후 사간원, 춘추관, 승문원, 지제교 등 주로 언론·문한직을 역임하며 장래가 촉망되는 관료로 성장하였으나 1530년(중종 25) 趙宗敬 등과 함께 권신 金安老를 탄핵하다 미움을 받아 1531년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이후 南陽의 村舍에 우거하다 가족들을 데리고 합천으로 낙향한 뒤로는 두문불출하다 1534년 42세의 나이로 고종하였다. 합천과의 깊은 인연 때문에 김포 선영이 아닌 합천의 華陽洞에 안장되었다.
이처럼 박소는 비교적 짧은 생애를 살았고 경륜을 펼쳐 보지도 못했지만 사림에서의 공로가 인정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文康의 시호가 내렸다. 나아가『己卯名賢錄』·『東國名臣錄』에 등재됨으로써 사림의 명현으로 칭송되었다. 나아가 그는 선조 박상충과 함께 반남박씨의 양대 현조로 인식되었고, 숙종 연간에는 그와 박상충의 유문을 합한『潘陽二先生遺稿』(朴世采刊)가 간행되었다. 朴紹는 슬하에 5명의 아들과 16명의 손자를 두었는데, 바로 이들 5자 16손에 의해 반남박씨는 17세기를 대표하는 명가로 부상하며 한시대의 정치·사상·문화계를 주도하게 되었다. 이 중 서계가문은 야천의 장자 應川→東善→炡→西溪로 이어지는 계열로서 冶川의 자손 중에서도 관직·훈공·학문이 가장 혁혁한 가계의 하나였다.
![]() [야천비석 좌측에서 본...]
![]() [야천 비석을 우측에서 본...]
![]() [거북모양을 한 귀부(龜趺)가 비신(碑身)에 비해 약한편...]
야천신도비를 접하고 또 합천과의 인연인 두 인물 즉 남명선생, 그리고 야천 선생 다들 지금도 우리가 되삭이고 있는 임진왜란 직전에 돌아가신 분들이다. 험한 꼴 안보고 돌아가신 분들이라 생각이 드는 것은 무엇일까? 이제 다시 차량을 끌고 임도를 이용 산꼭데기 까지 오른다. 현기증이 날 정도의 절벽위로 길이 나 있어 가끔 경치도 구경하며 오른 가파른 길 위에 작은 마을이 있다. 마을이라기 보다는 몇채의 집이 있다. 이곳에 재를 넘는 길이 있지만 길에 텐트도 치고 고추도 말리며 길이 없음을 무언으로 이야기하는 동네분 들이다.
![]() [묘산면의 소나무라 명명된 묘산의 보물인 소나무의 위용...]
![]() [어느 쪽에서 봐도 잘생겼다는 생각을...]
![]() [묘산면의 소나무 안내문...]
![]() [뒤쪽에서 본 모양이 더욱 아름다운 것 같아...]
![]() [당산목임을 한눈에 알 수...]
이 나무는 연안 김씨가 이 마을에 살게 된 사연과 이야기가 얽혀 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겨우 나라를 추 슬러 조금씩 안정이 되어 갈 즈음, 광해군 5년(1613) 비극적인 역모사건이 일어난다. 선조의 계비(繼妃)인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이 외손자인 영창대군을 임금 자리에 앉히려 했다는 무고사건이다. 결국 김제남은 그해 6월 초하루 사약을 받고 쉰한 살의 삶을 억울하게 마감한다. 이날 조선왕조실록에는 비극의 장면이 이렇게 실려 있다. 아내 노씨는 맨발로 대비전의 담장 밑으로 쫒아가 울부짖었다. 인목대비 의 어릴 때 이름을 부르며 ‘아무개야, 아무개야 어찌하여 너의 아비가 죽어 가는데 구해주지 않는단 말이 냐.’고 통곡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인목대비가 할 수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3년 뒤에 김제남이 다시 부관참 시를 당하였어도 계축일기를 쓰게 하여 후세에 남기는 것이 고작이었다. 삼족을 멸하는 당시의 풍습대로 김제남의 일가가 풍비박산이 되자 가까운 친인척은 살아남을 궁리를 하여야 했다. 김제남의 6촌 동생으로 알려진 사람은 이름도 숨긴 채 멀리 이곳으로 도망을 오게 된다. 먹고 살 수 있는 적당한 땅이 있고 아랫 마을에서는 한참을 올라와야 하는 곳, 숨어 지내기에는 적지 이다. 어떻게 이곳 을 찾아낼 수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는 우선 이 나무 밑에 초가를 짓고 살기 시작하였다. 당시에도 제법 크게 자란 나무가 있었다고 보아 지금 나무의 나이는 5백년 정도로 짐작한다.
![]() [남쪽으로 뻗은 가지의 모양...]
![]() [동쪽으로 뻗은 가지의 모양...]
![]() [서쪽으로 뻗은 가지의 모양...]
![]() [북쪽으로 뻗은 가지의 모양...]
이 나무의 모양은 땅위를 조금 올라와서 3개의 큰 가지로 갈라지고 올라가면서 다시 작은 가지가 갈라져있 다. 얼핏 보면 반송과 비슷하게 생겼다. 나무높이는 18m, 둘레는 6m에 이르는 거목이다. 이 나무는 구룡목 (龜龍木)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껍질의 갈라짐이 다른 소나무보다 더 보기 좋게 규칙적으로 거북이의 등처럼 생겼고, 나뭇가지 뻗음은 승천하려는 용모양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바로 옆에는 지름이 한 뼘도 넘는 또 다른 소나무 한 그루가 구룡목의 가지들과 뒤섞여 자라고 있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찾아낼 수 조차 없다. 자식이 다 자라 자신의 키를 넘나보도록 분가를 시키지 못하고 품 속에 감싸고 있는 듯한 모습 이 숙연해 보인다.
가만히 눈을 감아보면 영창대군을 아끼는 인목대비의 혼이 이 소나무에 깃들 어 있는 것 같다. 마을에서 부르는 이 나무의 또 다른 이름은 ‘할매나무’다. 불과 30여 년 전까지만 하여도 뒷산 중턱에는 더 크고 웅장한 ‘할배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송충이 한창 기승을 부릴 때 버티지 못하고 먼저 가버렸 다. 매년 음력 정월 보름 할매나무에 제사를 올릴 때는 잊지 않고 할배나무의 옛터에 먼저 가서 혼백을 불 러온다고 한다. 마을에는 이상하게 할아버지가 거의 보이지 않고 온통 할머니들뿐이다. 할배나무가 죽어버 린 다음부터는 할아버지 들이 먼저 저 세상으로 가버리는 일이 잦다고, 이야기를 풀어놓던 할머니는 쓸쓸 하게 웃는다. 고 전해들을 수가 있다.
![]() [동네엔 탐스러운 삼잎국화꽃을 한꺼번에 모아서...]
![]() [너무 멋져 다시 내려가며 또 찍어본...]
정말 이 산꼭대기까지 올라온 보람을 느낀다는 말을 서슴없이 할 만큼 소나무가 주는 깊은 인상이 새겨지는 곳이다. 이렇게 외진 곳에 있어 때 타지 않은 모습에 또 건강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곳을 떠나기가 싫은 듯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동네도 한 바퀴 돌아본다. 원래는 이산을 넘는 임도가 있어 그곳으로 바로 넘어가져 이렇게 꼭대기까지 올라왔는데 주민들이 거부를 한다. 우리는 다시 돌려 나갈 수밖에 없다. 야천신도비 밑 삼거리에서 빠른 길로 가려 좌측으로 내려서니 화양재라고 쓰인 새로 건축된 건물이 보인다.
![]() [화양재(華陽齋)가 새로이 단장된 듯...]
![]() [와양재의 입구인 솟을대문...]
![]() [안쪽에 자리잡은 화양재(華陽齋)의 모습...]
화양리를 빠져나가면서 제일 마지막에 화양재라는 건물을 찍었는데 자료는 없다. 그리고 이때의 시각이 벌써 오후 7시가 넘은 시각이다. 부지런히 가야 해인사 근처에서 잠자리를 얻을 수가 있을 것 같아 지도를 연신 보며 달려간다. 그러나 의외로 금방 야로면에 도착을 하게 된다. 야로면을 지나 가야교를 건너 인터체인지를 지나니 만봉장이라 쓰인 간판이 보인다. 이곳을 숙소로 정하고 조금 뒤로 올라가 휴게소에서 저녁을 해결하며 그리도 사연이 많게 오기가 힘들었던 해인사 앞에서 잠을 청할 수 있게 되었다. -<끝>-
- 글 / 그림 - [김영윤의 여행보따리]
![]() |
출처 : 김영윤의 여행 보따리
글쓴이 : 도시애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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