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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마지막 여행 (인천 차이나타운) 네번째

대가야고령 2016. 1. 5. 05:29

 

강화도 마니산. 전등사 여행을 마치고

초지대교 앞 강화인삼 판매장에서 인삼을 구입한후

인천시내 차이나 타운으로 간다

 

처음본 차이나 타운

야간 빨간 불빛과 거대한 규모와 이색적인 분위기에

약간 놀라고 상가는 잘 형성 되어 있다

이곳 저곳을 둘러 보면서 저녁을 먹는다

 

<인천 : 차이나 타운 역사>

-인천 화교는  130년 전인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의 군인과 함께 온 40여명의

 지역상인들이 이 땅에 정착하면서 그 역사는 시작되었다.

-이들은 주로 푸젠성, 저장성 등 남방인들로 청나라 군대에 물자를 공급하면서 조선 상인과

 무역도 하였다. 1884년 4월 "인천화상조계장정(仁川華商租界章程)"이 체결되면서 현 인천시

 선린동 일대의 5천평 토지에 중국 조계지가 세워졌지고 그해 10월 청국 영사관도 이곳에

 세워졌다.

 중국의 조계지가 생긴 후 중국의 건축 방식을 본뜬 건물이 많이 세워졌기에 이곳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차이나타운"의 최초 형태이다.

이후 원세개가 조선 통상 사무를 맡아 1887년에 부산, 1889년에 원산에 조계지역에 대한 담판을 성공시켜 중국 조계지역은 계속해서 확장되었다. 인천에 조계 지역이 설립되면서 화교의 수는 급증하여 1883년 48명이던 화교가 1년 후에는 5배에 가까운 235명으로 늘어났고 1890년에는 화교가 약 1천명에 이르렀다. 이처럼 중국인들이 증가하면서 당시의 청나라 관청(청국 영사관)이 이곳에 설립되고, 이를 청관이라고 불렀는데, 일본인들은 이곳을 중국을 비하하는 명칭인 지나정이라고 불렀다.

- 당시 화교들은 인천을 상업 활동의 중심으로 삼고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중국에서 수입한 식료 잡화를 팔고 다시 조선의 사금 등을 중국에 보내어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장의 전반적인 상권을 장악하였다.

특히 인천 조계지 내의 화상들은 한국 전역에 퍼져 있는 화상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사업은 날로 흥성하게 되었다. 또한1898년 의화단 (義和團)의 북청사변(北淸事變)으로 산동성 일대가 전란에 휘말리자, 이 일대 중국인들이 피난차 가까운 한국으로 대거 건너오기 시작하였는데, 이들도 주로 인천을 자신들의 집결지로 삼았기 때문에 인천은 부지불식간에 화교들의 근거지가 되었으며 서울과 함께 화교들의 양대 세력권이 되었다. 당시의 자료에 의하면 1884년 35척의 청조 선박이 인천과 마포항을 왕래하였으며 1만 3천톤의 화물을 운반하였다고 한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청나라 사람들은 청나라 정부의 후원을 받으며 그 당시 조선에서는 귀한 물품인 비단, 광목, 농수산품 및 경공업품을 수입하여 엄청난 이익을 획득하였다. 이에 따라 장기 거주를 목적으로 인천에 상가 건물이나 주거할 집을 지을 필요가 생겨 중국식 건축에 필요한 목수, 기와공, 미장공들도 한국으로 오게 된다. 특히, 인천과 뱃길이 트인 산동성에서는 조선의 인천은 돈벌이가 잘되는 곳으로 소문이 번져 많은 산동인들이 서해를 건너 왔다. 한편 1887년에는 산동 연태지방에 살던 왕씨와 강씨가 채소 종자를 들여와 채소 농사를 시작하니 당시 조선에서는 볼 수 없던 양파, 당근, 토마토 등이 모두 이들에 의해 전파되었다. 특히 중국의 상해, 청도, 연태, 석도 등에서 왕래하는 화물선이 기항하는 인천은 일본인 및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다 보니 다른 지역에 비해 화교의 숫자도 많아 그들이 조차한 지금의 차이나타운이 좁아 경동, 신포동 일대, 용현동, 주안, 부평지역에 모여 살며 상업 활동 외에 채소 시장까지도 그들에 의해 성업을 이루게 된다.

출처(인천차이나타운)  http://www.ichinatown.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