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암자

[스크랩] 고원습지와 바위벼랑의 암자-정취암

대가야고령 2011. 1. 18. 16:20

 

새해를 맞아 찾아 나선 첫 암자,

지리산의 장엄한 암자도 아니고,

바다를 안마당으로 삼는 수려한 풍광의 암자도 아닌 정취암.

이 암자를 찾은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네 삶의 공간과 떨어져 있지 않으면서도

둔철산의 고원 늪지와 아찔한 벼랑에 천여 년이 넘도록 그 터를 지켜왔기 때문이다.

명문거족은 아니더라도 지역민과 더불어 대대로 살아온

재지사족의 인정이 넘치는 절이라고나 할까.

벼랑에서 내려다 보면 암자와 하나가 된

겨울 들판과 집들이 우리네 고향처럼 펼쳐져 있다.

 

 

정취암은 신라 신문왕 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해발 600 미터의 깍아지른 바위 벼랑에 둥지를 튼 아담한 암자이다.

 

정취암의 창건 당시 동해에서 장육금신(부처)이 솟아 올라 두 줄기 빛을 발하였다.

한 줄기는 금강산을, 다른 한 줄기는 대성산(둔철산)을 비추었다고 한다.

이 때 의상대사가  두 줄기 빛을 쫓아 금강산에는 원통암을, 대성산에는 정취암을 창건하였다는 설화가 있다.

인근에 있는 율곡사(주민들은 밤절이라고 부른다.)는 원효스님이 창건하였는데,

정취암과 율곡사에 각기 주석하던 두 분은 수시로 왕래하여

서로의 수행력을 점검하고 탁마 수행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암자 마당에는 수탉 한 마리와 암탉 두 마리가  정겹게 어울리고 있었다.

이 사진은 5년 전의 정취암 뜰의 정경이다.

오늘 가서 보니 닭들은 사라지고 복스러운 개 한 마리가 여행자를 맞이하였다.

 

 

암자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전각이 원통보전이다.

원통보전 앞으로는 이전의 자연스런 돌담이 사라지고 어느새 기와로 새단장을 하였다.

삼성각 앞 바위를 올려다 보면 거북이를 닮은 바위가 있다.

가까이서 보면 두개의 바위인데, 멀리서는 밑에 물린 바위가 머리 형상이 된다.

같이 간 서울 촌놈인 조카한테 아무리 설명해도 거북이의 형상을 잡아내지 못한다.

 

 

원통전 뒤로 난 돌계단은 삼성각과 응진전으로 나누어 진다.

벼랑 끝에 서 있는 삼성각은

석등 앞의 돌담이 없다면 심약한 이들은 감히 접근조차 못할 것이다.

5년 전에는 무채색이어서 예스러운 맛이 있었다.

잘 생긴 소나무 한 그루와 낡은 전각 한 채, 조촐한 석등 하나가

천길 벼랑 위에서 멋진 풍경을 보여 주던 곳이었다.

오늘, 전각 옆 바위에는 소원을 담은 동전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고

석등과 소나무는 공사중인 철근에 갇혀 있었다.

 

삼성각 삼성각은 칠성(七星), 산신(山神), 독성(獨聖) 세 성인을 봉안하는 전각이다.

칠성은 원래 도교의 신안대상인 북두칠성을 의미한다. 인간의 길흉화복을 맡아 칠성여래, 칠원성군이라고도 한다.

산신은 우리의 토속신앙으로 불교와 융합되었다. 고조선 건국신화와 관련된 토속신앙으로 호랑이는 산신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독성은 나반존자로 천태산에서 혼자 도를 닦아 깨달았으므로 독성이라 한다.

 

 

산신탱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43호)

삼성각 안에 있다. 이 그림은 1833년에 제작된 것으로 가로, 세로가 각기 150cm 크기의 불화이다.

산신이 호랑이를 타고 행차하는 것을 협시동자가 받들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육중한 산신과 힘들어 고개를 갸우뚱하는 호랑이의 모습이 익살스럽다.

원래 우리의 토속신앙인 산신과 불교의 혼합을 잘 보여주는 사례인 셈이다.

 

작지만 짙푸른 대숲이 응진전과 퍽이나 어울린다.

거대한 바위벽을 배경으로 선 응진전은 정취암 내에서

가장 푸근한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응진전  아라한(나한)을 봉안하는 전각을 말한다.

보통 라(나)한전이나 영산전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주불은 석가모니불을, 좌우에 16나한 또는 500나한(부처의 제자)를 봉안한다.

응진은 지로써 이에 응하여 진리를 깨달은 이를 가리킨다.

 

응진전의 벽화가 하도 재미가 있어 한 샷 했다.

그야말로 호랑이가 담배 피우고 토끼가 담뱃불을 붙이고 있다.

 

 

응진전 뒷길을 따라 가면 작은 산책길이 나온다.

채 5분도 오르지 않아 넓은 바위가 펼쳐진 봉우리에 이른다.

수십명이 앉을 수 있는 이 곳은 바위 곳곳에 주석할때가 많아 스님들이 수도하기에도 좋을 법하다.

아울러 정취암과 주위 풍경을 내려다 보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을 것이다.

 

 

이 너럭바위 위에서 정취암의 유래와 관련된 전설 하나를 바람결에 들어 본다.

고려 말기 어느 때에 정취암 바위굴에는 500년 먹은 여우가 살고 있었다.

이 여우는 매년 섣달 그믐이면 사람을 홀려서 한 명씩 죽였다.

그리하여 정취암에는 섣달그믐이 되면 스님을 비롯한 대중들이 절을 비우고 피신하게 되었다.

정취암 십여리 밖의 소이마을에 문가학이라는 선비가 이 소문을 듣고 여우를 직접 잡으러 나섰다.
문가학은 섣달 그믐날 술 한말을 짊어지고 정취암에 올랐다.
삼경이 깊어갈 무렵 미색이 빼어난 여인이 절 앞을 서성거렸다.

문가학은 이것이 요괴구나 생각하고 밖이 추우니 들어오라 하고 마침 술이 있으니 한 잔 하자고 하였다..

밤이 깊어가고 여인이 술에 취하여 잠이 들자 문가학은 준비한 끈으로 손과 발을 묶었다.

여우가 놀라서 깨어 자기에게 있는 둔갑술 비결이 있는 책을 주겠으니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였다.
문가학은 그 책을 주면 살려주겠다고 하니 여우가 책을 굴에서 가져 나와 건네 주었다.

문가학이 책에 빠져 있는 동안 여우가 끈을 풀고 책을 낚아서 굴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 후 문가학은 책에서 본 대로 갖은 둔갑술을 부릴 수 있었지만 옷고름은 숨길 수 없었다.

마지막 둔갑술이 적힌 부분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가학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게 되었고

여우에게 배운 둔갑술로 새로 변하여 궁궐에 들어가 은자를 빼내어 거사자금으로 쓰다가 발각되었다.

결국 문가학은 역모죄로 참수되었고 그 집터도 못이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당시 보수세력에 대항한 공민왕의 개혁세력이 일으킨 거사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신돈스님이 인근 진주  청곡사에 주석하였고, 공민왕 3년에 스님도 아닌 화경, 경신 두 거사가 절을 중건하였고

 이후 왕실에 있던 정취보살상을 이곳으로 옮겨온 점, 삼우당 문익점이 문가학과 같은 남평문씨 일족이라는 점이 뒷받침하고 있다.

결국 이 곳의 개혁세력과 왕실이 은밀히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정취암을 나서니 복실이(?)가 大자로 뻗어 자고 있었다.

암자에 들어설 때 지나치게 반갑게 맞이하더니 이젠 지친 모양이군.

"잘 자라" 인사를 하고 돌계단을 내려서니 아니 이놈이 멍멍 짖더니 하품을 쩍 하는게 아닌가

'천상 게으른 놈이구나' 생각을 하고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을 떼지 않았는데, 복실이가 돌계단을 무섭게 뛰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뚱뚱한 몸이여서 돌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폼이 여간 불안하지가 않았다.

걱정은 걱정일 뿐, 복실이는 우리를 앞질러 한참을 보이지 않더니 주차장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뚱뚱한 몸과 낮잠이 복실이에 대한 오해를 하게 되어 괜스레 미안해졌다.

 

 

정취암 표지판을 보고 비탈길을 가다 보면 길은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오른쪽 비탈길을 100 미터 가면 주차장이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숨이 턱에 찰 정도면 정취암에 이른다.

솔숲이 좋고 바위 사이로 흘러내리는 석간수를 맛볼 수 있는 암자 가는 길이다.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가면 차로 바로 절마당까지 갈 수 있다.

비포장길과 시멘트길이 번갈아 있는데, 바위 벼랑에 걸린 정취암을 멀리서 볼 수 있다.

 

임도에서 본 정취암 정경

 

정취암을 차로 갈 수 있는 이 길은 임도이다.

고개 막바지에 이르면 둔철목장가는 길과 둔철마을, 정취암 가는 길로 나누어진다.

둔철마을 길을 택하면 늪지인 산중의 고원지대를 만나게 된다.

여행자는 산중의 이 넓은 고원습지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 그저 바람에 부는 억새와 들꽃들만이 오랜 주민들과 사는 곳.

이곳에도 개발의 바람은 피해가지 않았다.

 

 

간디학교와 안솔기 마을이 들어설 때만 해도 괜찮았다.

그 후 이 산중에 멋진 아스팔트 길을 내더니만

급기야 생태체험공원을 만든다고 산을 온통 헤집어 놓았다.

비포장도로 외길만 해도 미안한 일인데,

산을 마구 파헤치어 무슨 생태를 체험한다고.

트럭들이 지나가는 이 길 위에서 여행자는 분노 비슷한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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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김천령의 바람흔적
글쓴이 : 김천령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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