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11월 (58차) 문화원 산악회 " 전남 담양 금성산성" 2 - 1
가을 산행하기 좋은날 우리는 금성산성을 찿아서
17. 11. 11 금성산성으로 출발.
주차장 - 보국문 - 동자암 - 내성동문 - 동문터 - 강천사갈림길 -
연대봉 - 저수지 갈림길 - 북문 - 서문터 - 철마봉 - 충용문 - 보국문
<금성산성. 산성산>은
산성산 해발 603m의 최고봉. 금성산성은 조선왕조의 말기까지 중요한 진영으로 경영되었으나 이후 폐허화되다시피 방치되었다. 금성산성의 축조시기는 삼한시대 또는 삼국시대에 건립되었다고 전하나 희박하고 문헌상 최초의 기록은『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고려 우왕 6년(1380) 왜구에 대비해 개축하면서 ’금성(金城)’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고종 43년(1256) 몽골의 차라대군(車羅大軍)이 담양에 주둔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13세기 중엽 산성이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금성산성(金城山城)’이라는 명칭이 등장한 것은 조선(朝鮮)의 태종(太宗) 시기로 1410년 2월 전라·경상도의 12개 산성이 수축된 기록에 ’금성산성’이 들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금성산성(金城山城)’이라 하여 위치·규모·시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추월산(秋月山)에 석벽이 사방을 둘러 둘레가 9018尺, 13泉이 있고, 연동사(煙洞寺)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입보농성(入保籠城)의 최적지로 산성의 보수가 이루어지고 그 중요성이 커진다.
임란 이후 장성의 입암산성(立岩山城), 무주의 적상산성(赤裳山城), 담양의 금성산성(金城山城)이 호남의 3대산성으로 알려졌으며 이후 계속적인 수축이 이루어진다.
수축시기를 보면,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에 대비하기 위하여 광해군 2년(1610) 부사 최동립(府使 崔東立)이 개축 광해군 14년(1622) 순찰사 황근중(巡察使 黃謹中)이 대장청(大將廳) 등 건립 효종 4년(1653) 성첩(城堞) 중수(重修) 금성산성은 담양에 읍성(邑城)이 없기에 전란 시에 오랜 시간 농성하면서 인근의 구원군이 도착할 시간적 여유를 가지기 위해서 보다 유리한 산상(山上)에 축조한 것이라 보여진다.
금성산성은 읍성적 산성으로 관리 운영되어 왔을 가능성이 크다. 『금성진별장생안에는 영조 18년(1742)부터 고종 12년(1875)에 이르기까지 재임하였던 별장들의 명단이 있다.
산성의 형태는 지형적인 여건으로 보아 산성으로 분류되며, 지리적으로 내륙성이고, 중복도로 구분하며 복곽식으로서 석성이다. 옛 문헌을 종합해 보면 외성,내성, 성문, 옹성, 망대 등 갖추고 성내에는 사찰, 민가, 우물 등과 관아시설 및 군사시설과 같은 각종 시설물이 들어서 있어 산성으로 그 위용은 대단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금성산성의 전체길이는 7,345m이며, 외성(外城)이 6,486m, 내성(內城)이 859m이다. 연면적은 1,197,478㎡(362,237평), 내성(內城)의 면적은 54,474㎡(16,478평)이다.
동서남북문의 터가 있는데 이 4개소의 통로 외에는 절벽 등으로 통행이 불가능하여, 요새로는 더할 데 없이 좋은 지리적 특성을 갖고 있다.